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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Apr 06. 2021

산티아고 가는 길 - 서른 번째 날

트리아카스텔라- 사리아(25km)


어쩐지 푸짐한 아침



  2층 침대에서 묶는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을 살짝 설쳤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럭저럭 잘 잤다. 5시 반에 일어났는데 정말 오랜만에 '조금 더 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어나야지. 오늘 갈 길이 멀다.

 

 조용히 씻고 나와서 짐을 싸려는데 건너편 침대에서 묶는 순례자 일행 세 명이 아예 불을 켜고 본격적으로 짐을 챙기길래 조금은 마음 편하게 짐을 꾸릴 수 있었다. 내 2층에서 묶던 아저씨가 안 보이는 게 아무래도 먼저 출발하신 건가 싶었는데 밥 먹으려 내려간 반지하층 식당에서 마주쳤다. 간단하게 인사하고 물을 끓여 수프를 만들어 빵을 찍어 먹고 스틱과 등산화를 챙겨 6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밥을 안 먹은 건 아니지만 왠지 아쉬워서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바에서 츄러스와 쇼콜라떼를 하나 시켰다.

 

  초코 우유가 아닌 좀 더 걸쭉한 핫초코가 먹고 싶었지만 쇼콜라떼 뿐이라고 해서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그걸 시켰는데 딱 내가 원하는 점도의 초콜릿이 나왔다! 츄러스는 한국에서 익히 먹었던 별 모양보단 좀 더 찌그러진 밀가루 빵 느낌이었고  뜨겁고 걸쭉한 쇼콜라떼에 찍어 먹으니 정말 눈이 번쩍 떠지게 맛있었다. 초콜릿은 많이 달지 않아서 먹기 딱 좋은 정도였다. 




빗길을 걷게 해 준 고마운 츄러스와 초콜릿



어둠과 폭우, 그리고 순례자



    순식간에 츄러스와 쇼콜라떼 한 샷을 먹어 치우고 짐을 챙겨 드디어 출발. 그런데 날이 어두운 데다 비까지 쏟아져서 정말 앞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마을을 나가서 차도를 따라가는 길,  도로 한쪽의 공사 중 표시를 피하고 커브길 표시도 눈여겨보고 마주 다가오는 차들의 헤드라이트를 피해 가며 빗속을 걸었다. 긴장해서 무서운 마음에 발이 빨라지니 땀이 정말 주르륵 흐를 정도로 쏟아지는데, 뒤집어쓰고 있는 통기가 전혀 되지 않아 옷 아래에서 땀으로 미끌거리는 팔다리가 느껴질 정도였다.



  차도 한쪽으로 강가에 놓인 데크를 걷나 싶더니 어느새 길은 숲으로 이어진다. 숲은 차도 안 다녀서 아무래도 덜 위험할 테니 걷기가 좀 더 나을까 싶었지만 반사되는 인공 불빛 조차 없어 더 어둡고 나무에서 뿜어내는 습기까지 더해 더 힘든 길이었다. 높은 나무는 빗방울을 모으고 모아 동전처럼 크게 뭉쳐 나에게 던져대고 무릎 아래로 치이는 풀들은 거기에 질세라 빗방울과 낙수를 신나게 튕겨대고 있었고 그 사이를 부실한 우비 하나를 뒤집어쓴 채로 걸어야 했다. 


  어두운 숲에서 방향을 잠깐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순례자 한 명이 쿨하게 방향을 알려주고 휘적휘적 사라진다. 저 사람은 힘들지도 않은가, 멍한 상태로 부러움 반, 신기함 반으로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었다. 어느새 해가 뜬 건지 눈앞이 조금은 밝아져서 발아래가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다. 안경엔 빗방울이 가득 튀어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마을 비슷한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몇 번을 만났던 H와 그의 동행을 만나 인사를 대충 하면서 마을 비스무리한 이 동네에  문 연 바 Bar가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하나 있는 바가 문을 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마을을 나와 숲으로 향했다. 생 장 피드포르에서 산 우비는 왠지 다 새는 듯 우비 안쪽도 바깥이나 다름없이 축축했고 잔뜩 껴입은 옷들 때문에 몸은 점점 더워지고 안경에 물방울이 가득해서 앞은 안 보이고 콧물은 계속 나와서 훌쩍여야 했고......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는 숲길. 누군가는 동화같이 아름다웠다는 길은 비 오는 이른 새벽엔 뭔가 음험하고 헉헉대게 되는 길이었다. 누군가는 요정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라고 했지만 내 눈엔 따뜻한 커피와 비를 피해 발을 말릴 장소를 제공할 테니 영혼을 넘기라는 악마가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물론 악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다행히 내 영혼을 소유한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그저  '여기까지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눈앞에 사모스가 나타났다.





안갯속의 수도원과 반지, Ultreia!



  긴 내리막 저 아래에 안개에 가득히 싸인 신비로운 모습의 수도원이 보였다. 수도원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때의 나는 사모스의 마을에 있는 바에 들어가 뭐라도 먹고 좀 앉아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엄청난 내리막을 걸어 그 힘든 와중에도 검색해둔 햄버거 맛집을 가려고 했지만 문을 열지 않아서 그 근처에 있는 다른 바에 들어가 119를 부르는 심정으로 카페 콘레체와 케이크 하나를 주문했다.


파운드 케이크와 카페 콘 라체. 그 정신없는 와중에 사진은 또 남겼다.


  화장실도 갔다 오고, 비가 와서 좀 습했지만 발도 좀 말리면서 케이크와 커피를 허겁지겁 먹고 나니 그제야 먼저 와있던 H 일행이 눈에 띈다. (심지어 내가 합석도 해 있었다) 사모스 수도원에서 판다는 오리지널 전진 반지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Z 커플이 바에 들어온다. 그들은 전진 반지를 구해서 이제 사모스를 떠나 다음 마을로 가려는 참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그 반지라는 것을 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 바로 앞에 있던 바라서, 수도원까지는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반지를 판다는 성물 판매소에 들어선 순간, 눈앞에 굳게 닫힌 문에 붙은 판매소 운영시간표가 보인다. 알고 보니 정해진 시간에만 10-15분씩 잠깐 열었던 거고, 아까 반지를 샀다던 Z커플이 9시 30분에 들어갔으며, 다음 오픈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10시 5분. 어쩔까, 잠깐 고민하다가 숙소는 예약도 했으니 여기서 20분 좀 넘게 기다려도 크게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판단에 짐을 풀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앉아서 앞으로 갈 길을 휴대폰 어플로 체크하고 있는데 성물방의 문이 덜컥 열린다!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신부님인지 수사님인지 알 수  없는 분이 나와서 성물 방의 문을 열어주셨다. 성물방에 들어가 잠깐 쓱 훑어보고 반지를 살 거라고 말하니, 사이즈 측정 링을 꺼내 주셔서 그걸로 내 손에 맞는 반지 치수를 찾아 보여드리니 잘 포장되어있는 내 사이즈의 전진 반지를 꺼내 주신다.



반지 옆면에 Ultreia(전진)이라고 새겨져있다 | 습기차고 아름다운, 사리아로 가는 길





   예상보다 빠르게 반지 구매가 끝나서 신난 마음을 안고 사모스를 나섰다.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방향도 반대로 갈 뻔했다. 다시 정신줄 잡고 걷는데, 왠지 마음속으로 '전진! 전진!'하고 외치게 된다. 이게 전진 반지의 효험인가 싶어서 속으로 혼자 웃으며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흐리지만 비는 많이 걷힌 길을 계속 걸었다.



  사모스에서 나가는 길은 편평하고 강을 따라가는 길이라 좋았는데 조금 더 걷다 보니 다시 산길이다. 직선거리로는 얼마 안 되고 구불 거리는 길로만 봐도 얼마 안 되는 길인데 높낮이가 제멋대로인 구불구불한 길을 가니 진도도 안 나가고 기운만 빠진다. 하지만 애써 전진! 전진! 을 외치며 없는 기운을 끌어내 열심히 걷다가 죽기 직전(?)에 카페 하나 발견해서 커피 하나 마시고 잠시 쉬다가 다시 꼬박 한 시간 반을 걸어 사리아에 도착했다!


  원래의 루트에 있던 다리가 공사 중으로 폐쇄되어서 할 수  없이 강가를 따라 조금 걷다가 인도로 올라가려고 월담(?) 비슷한 것을 해야 했다. 구시가지와 메인 유적지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 걷는데, 힘겹게 이곳까지 걸어온 나에게 최종 시험이라도 하는 듯 오르막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죽음의 골짜기를 넘는 심정으로 기다시피 계단을 걸어올라 정말로 간신히, 내 알베르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맥주 꿀꺽하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카메라를 꺼낸 현장감이 생생하게 찍힌 사진


  바로 앞에 중국인 마트가 있어 원활한 한국 라면 공급이 보장된 훌륭한 위치의 숙소였지만, 씻고 빨래하고 나오니 역시 시에스타라, 중국 마트에서 라면을 사서 점심으로 먹는 계획은 물 건너가서 , 길 가에 유일하게 문 열고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햄버거와 맥주를 먹었다. 


  숙소에 돌아와서 잠깐 눈을 좀 붙였다가 일어나서 근처의 막달레나 수도원으로 마실을 나가보았다. 가다가 마주친 백인 남자애들이 나에게 뭔가 인종차별적인 장난을 친 것 같았지만 알아듣지 못해 화도 내지 못한 작은 슬픈 사건을 넘기고 막달레나 수도원 입장. 유료는 아니었지만 수도하는 공간이라 그런지 인원을 제한해서 들여보내고 있었다. 과연 여타의 번잡 시끄러운 관광객 느낌의 성당과는 달리 고요하고 조용한 느낌의 성당과 회랑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신라면과 짜파게티, 물과 맥주를 샀다.  바로 저녁을 만들어 먹었는데 숙소에 있는 냄비가 작고 둥글어서 하이라이트 면에 밀착이 안 되는 탓에 물이 한참 동안 끓지 않아 은근 애 먹었다. 라면에 맥주 먹으면서 보니 오랜만에 만난 한국분들이 숙소 한쪽에서 다 같이 요리해서 저녁을 만들고 계셨다. H, Z커플, JS , L과  오랜만에 신나게 이야기하며 와인도 조금 얻어 마셨다. 이틀째 연박 중이었던 도현 씨도 오랜만에 만나서 한참 이야기하다 잠들었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JpD-MepD0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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