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것, 찾은 것 그리고 알게 된 것
큰 목표는 없이, 그저 '걸어보자' 하고 걸은 게 꼭 36일이었다.
몸이 아픈 날도 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걸었던 것은 기필코 조금이라도 나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닌, (사립) 알베르게의 청소 시간엔 어차피 짐을 어느 정도 정리해두고 나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어차피 침대에서 등을 뗄 수밖에 없다면, 단 5km만이라도 걸어서 이동하는 게 낫다는, 집순이식 외출 관리의 일종이었다.
산티아고에서 다른 도시로 떠나는 비행기를 예매해두긴 했지만 일정이 촉박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버스나 택시를 이용한 점프는 하지 않고 모두 두 발로 걸었다. 다만 너무 많은 길을 걸어야 하거나 힘들 것이 뻔한 길이면 동키로 배낭을 미리 보내 몸의 부담을 최소화했다. 걸을수록 좋아지는 길이라 짐을 줄이고, 하루 걸을 거리를 줄이더라도 모두 두 발로 걷고 싶었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동행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둘씩, 셋씩 짝지어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알베르게를 잡아 같이 저녁을 먹고, 대도시에서 이틀씩 연박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패밀리'가 형성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러 패밀리가 가끔 나를 끼워주어 저녁을 같이 먹거나 짧은 구간을 동행하곤 했지만, 나는 긴 여정을 오롯이 함께 걷는 동행을 구하지는 않았다. 물론 의도적인 것도 있었지만, 혼자인 것을 너무 좋아하는 내 기질이 못다 한 말로 표현이 되었던 건지, 고맙게도 사람들은 내 곁에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 목적을 위해 길을 걸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습이다. 확 불타오르진 않지만 스스로 불타고 있다는 생각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차가운 열정, 게으른 성실함. 그 와중에도 몸 건강은 꾸준히 챙기는 건강 염려가. 낯선이들에게 먼저 말 걸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지만 너무 가까워질 것 같은 사람에겐 말을 아끼고 적당한 벽을 두른 채 혼자임을 즐기는 고독가.
어쩐지 나의 나머지 인생도 이 길에서 미리 본 듯한 느낌이다. 이런 의미라면, '이 길을 걸으면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인 거다.
하지만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은 나를 모르는 사람에겐 목적이 될 수 있지만, 이미 스스로를 알고 있던 사람에겐 그다지 매력적인 목적은 되지 못한다. 꼭 길이 아니더라도 아무 곳에서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사유하면 결론을 얻을 수 있으니까. 까미노를 마치고, 나에게 '왜 그 길을 걸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난 내가 왜 걸었는가를 생각했고, 곧 답을 찾았다.
나는 길을 걷는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 이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길 위에선 걷는 이유를 계속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완주를 위해서' 나 '맛있는 저녁을 먹기 위해서' 같은 이유도 좋고, '세상은 왜 불평등한가', '평화는 올 것인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고민도 모두 길을 걷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순례길을 인생에 비유했을 때,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삶의 이유를 찾아가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다.
걷는 이유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걷는 것. 그게 내가 순례길 끝에서 찾은 '진짜 목적'이다.
까미노 초반에 계속 같은 알베르게에 묶었던 S를 광장에서 다시 만났다. 노을을 한껏 받아 붉게 빛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보았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장애가 있는 가족과 함께 휠체어를 끌고 산티아고로 도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광장에서 '나는 해냈어... 나는 해냈어' 하고 울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걷지 않고 자전거로 걷거나, 중간중간 점프해가며 편한 길만 걷는 사람들을 내심 '저건 진짜 순례길이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누구나 자신의 길은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정말 그 말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버스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이나, 짧은 구간만 걷는 사람들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시하고 가볍게 보고 있었던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산티아고 도착 이틀쯤 전에 두 아이를 카트에 태우고 거기에 자전거를 매달아 순례를 하는 부모를 보았다. 훨씬 전엔 나이 든 부모님과 함께 걸으며 체력을 고려해 짧은 거리만 걷고 나머지는 버스를 타는 자녀도 보았었다.
얼마나 짧은 구간을 걷든, 어떤 수단을 이용하든 그들 모두는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것이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하루에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길을 걸었지만, 사실 수백 개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것은 우열을 가릴 수도 없고, 좋거나 나쁘거나를 판단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순례길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이건 모든 사람은 각자 인생의 길을 걷고 있고, 다른 사람이 함부로 판단해선 안된다는 걸 뜻한다. 끊임없이 다른 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서로 평가절하하고 사는 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인데, 이게 가능할까 싶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순례자들은, 단지 그 힘든 길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도움을 주고받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저 멀리 힘들지 않아 보이게 걷고 있는 사람의 길 역시 나와 같은 길이고, 그 나름대로의 힘든 길임을 알게 된다면. 그래서 물 한 모금이라도 나눠 마시는 작은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의 세상은 꽤 괜찮아지지 않을까. 2천 년 전, 그리스도가 야고보 사도에게 '사랑'을 보여주었듯이, 야고보의 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그런 '사랑'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