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야바 - 팜플로나 (3km)
여유로운 일정이라 늦잠을 좀 자볼까 했지만 같은 방 사람들이 워낙 부지런해서 6시 넘어 강제 기상할 수밖에 없었다. 대충 준비하고 내려가서 3.5유로짜리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토스트 2장, 햄치즈 무제한, 음료 무제한에 그 가격이면 상당히 좋은 조건이었지만 당연하게도 여정의 초반엔 그걸 알지 못했다. 지난밤에 순례자 메뉴에 딸려온 와인을 많이 마시고 곯아떨어져서 동키를 예약 못했는데, 다행히 같은 숙소에 묵었던 JH가 유창한 영어로 스탭에게 물어봐 주었다. 팜플로나까지 3Km밖에 안 되는 일정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갈 정도는 아니었기에 5유로와 짐을 로비에 두고서 숙소를 나섰다.
서둘러 걷는 사람들 틈에서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산책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걷다 보니 2시간도 안되어서 팜플로나에 도착해버렸다. 예약해둔 호스텔의 체크인 시간은 (당연히) 아직 멀었고, 시내에서 볼 일을 다 보고 들어가야 했다.
사실 더 걸어도 되었지만 팜플로나에 도착한 날은 일요일이었고 나에겐 두 가지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주일미사 참석. 짧게나마 걸어본 바로, 걷는 중간의 작은 마을들의 성당은 작거나 폐쇄된 경우가 있어서 그나마 큰 도시인 팜플로나의 큰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생각으로 일요일 동안 머무를 계획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월요일에 우체국에 가야 하는 일이었다.
순례길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 중, 산티아고 우체국에서는 스페인 내에서 보내는 모든 우편물을 일정 기간 동안 저렴한 가격으로 보관해준다는 정보가 있었다. 순례길 이후에 다른 나라나 도시의 여행 계획이 있는 나 같은 경우 이후 착용할 (등산복과 등산화가 아닌) 옷가지들도 챙겨 온 터라 도착지인 산티아고에 미리 보내 두는 건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 둘째 날 도착한 론세스바예스를 비롯해 그동안 지나쳤던 다른 도시에서 이 우편 업무를 하지 못한 것은 순례길 루트 근처에 우체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팜플로나는 스페인 내에서도 비교적 큰 도시고 우체국도 있어서 큰 캐리어를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부쳐버리고 나머지 최소한의 짐만을 등에 매고 진정한 순례길을 걸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팜플로나에 도착한 것은 일요일이었고, 당연하게도 우체국은 문을 열지 않았다. 최소한 월요일 아침에 부쳐야 했기에 나는 아예 팜플로나에서 하루를 묵어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11시에 시작하는 미사에 참례하고 근처의 타파스 바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은 뒤 예약해둔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팜플로나의 시내와 유적지를 구경했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우니(!) 팜플로나 구경 기록도 조금 남겨보기로 한다.
대성당은 미사 시간이 한참 남아 근처의 산 니콜라스 성당에 갔다. 외국의 성당에서 미사 드린 건 처음이었는데, 작은 도시의 작은 성당이라 그런지 주일 미사인데도 사람이 적었고 한국에서와 다르게 봉헌 주머니를 든 봉사자가 수금(?)하러 돌아다니고 성체분배 때엔 사람들이 줄지어 나가는 대신 우르르 나가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 평화의 인사는 (합장 후 반절이 아니라) 악수였다. 등산복에 등산화 차림이라 누가 봐도 순례자였던 나를 향해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해주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대성당 뒤쪽으론 타파스 거리가 있어서 일요일의 점심을 즐기려는 시민들 + 관광객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그중에 구글 평이 괜찮은 식당을 찾아갔는데 12시부터 오픈 이래서 기다리면서 가게 외관을 구경하는데 미쉐린 타이어 마크가 붙어 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미쉐린 맛집...!! 안 그래도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꼭 기다려서 먹고 말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12시 땡 하자마자 셔터를 올리고 영업을 시작한 가게에 들어가서 추천받은 대로 카바(화이트 와인) 하나를 시키고 메뉴판의 스페인어와 영어의 향연을 멍 때리며 보다가 winner라는 두 타파스를 시켜 먹었다.
전날과 다르게 조금 덜 걷고 쉬었다 가려던 계획이었지만 깊은 역사만큼이나 볼게 많은 동네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느라 시내에서만 7km 정도를 걸었던 듯하다. 예상보다 추운 아침과 저녁 공기에 더 이상 당황하지 않기 위해 대성당 근처의 순례자 용품 파는 가게에서 도톰한 내피와, 하루 만에 햇빛에 뒤집어져버린 불쌍한 입술을 위해 선블록 기능이 있는 립밤도 샀다. 규모 있는 할인 매장에서 샀더라면 좀 더 싸게 살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도착한 일요일에 웬만한 가게는 다 문을 닫고 순례자들을 위한 몇몇 상점들만 문을 연 상태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7월에 있다는 산 페르민 축제 중 일부라는 거인인 형 퍼레이드 행렬이 어쩐 일인지 9월 초에 지나가고 있었다. 주말 오후, 동네 아이들이 부모 손 잡고(혹은 무등 타고) 나와서 행렬을 구경하는 모습이었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인형탈을 쓴 사람들의 장난에 까르르 웃는 아이들 목소리에 왠지 내가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진짜 관광객'처럼 카메라를 목에 걸고 신기한 듯 번화가를 두리번거리는 대신 동네 마트에서 다음날 먹을 물과 간식 몇 개를 사서 골목길을 지나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 더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타파스 바에서 와인 하나와 몇몇 타파스를 먹고 숙소로 돌아오니 한국 순례자 세분이 라면을 끓여먹는다고 부산하다. 한국에서 가져오신 거냐 물으니 팜플로나에 한국 라면 파는 곳이 있다고 한다. 아니 대체 그런 꿀 정보는 어디서들 얻는 거야?...... 같은 달에 출발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단톡방에서 각종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특히 한국 음식 파는 곳과 베드 버그 출몰지역). 동방예의지국의 시민들 답게 나에게 한 젓가락을 권하셨지만 외국 여행 와서 한국음식에 목매는 건 왠지 글로벌하지 못하다고 느껴서(그리고 나는 정확하게 10일 뒤부터 한국 라면 파는 마트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개 된다) 우아하게 거절하고 차 한잔 마시며 일기 쓰다 잠들었다.
(유튜브 영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