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육, 개천에서 용이 날까?

12세에 인생이 결정되는 나라의 비밀

by 티쳐맘

두 번째 싱가포르에 갔을 때 나는 새벽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데, 그때 시간이 오전 6시 반에서 7시 사이였다. 바깥 풍경을 감상하던 중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을 목격했다.

해가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학생들이 가방을 메고 등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일찍 가는 건가...?'

직업이 선생님이어서 그런지 걸어가는 학생들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된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시간을 내서 그 나라의 초등학교에 가본다. 그리고 그 나라 교육과 관련된 글을 찾아보거나 현지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직업병인가 보다.^^


운 좋게도 글렌을 통해 나는 싱가포르 초등학교 선생님인 에이미를 알게 됐다. 에이미로부터 싱가포르 교육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높은 교육열이 한국과 비슷하기도 했고, 한국과 다른 면들도 있었다.

"에이미! 근데 왜 학생들이 해도 안 뜬 새벽에 학교에 가는 거야?"


싱가포르는 초등학교 등교 시간이 7시 반이야. 아침 보충수업이 있거나 부모님 출근 스케줄 때문에 6:30~7:00 사이에 학교에 오는 애들도 많아.

잠깐, 뭐라고? 7시? 7시 반? 한국 초등학교는 거의 8시 50분~ 9시인데..!

싱가포르는 오후 2-3시가 되면 날씨가 많이 덥기 때문에 집중력이 높은 오전에 몰아서 수업을 진행한다. 오후에는 1-3시에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활동이나 보충수업을 한다.

12세에 결정되는 인생?

싱가포르 친구들과 다 같이 모일 때 가끔 글렌은 오지 못했다. 글렌은 회사를 다니면서 동시에 파트타임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는 거 진짜 대단하다!"

글렌이 대답했다.

"나는 3년제 Polytechnic을 나왔는데, 회사에 들어가니 4년제 대학교를 나온 동료들과 갭이 생기더라. 그래서 파트타임 대학교를 다니는 거야."

싱가포르는 초등학교 졸업할 때 PSLE라는 시험을 보는데, 그 시험 하나로 인생이 갈린다고 봐도 돼.
나는 그때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서 시험을 잘 못 봤거든. 그래서 지금 노력하는 거지 뭐.

뭐? 초등학교 졸업시험으로 인생이 결정된다고?

처음엔 과장된 표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초등교사 에이미의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로 12세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조금은 잔혹한 시스템이었다.


PSLE - 한국의 수능을 12세에 치는 시스템

PSLE (Primary School Leaving Examination)

영어, 수학, 과학, 모국어(중국어/ 말레이어/ 타밀어 중 선택) 4과목 시험

초등학교를 떠나는 시험. 이 시험은 우리나라 수능과 비슷한데, 12살에 치는 수능이라고 보면 된다. 12살이면 아직 어린데.. 수능이라니! 그리고 이 시험 결과에 따라 아이들의 운명이 세 갈래로 완전히 갈린다. Express, Normal Academic, Normal Technical이다.

Express 트랙 (4년, 상)

Express(4년, 중등교육)-"O-level test"-Junior College(2년, 고등교육) -"A-level test"- 대학교 진학

PSLE 상위 성적 학생들만 입성

Express 학생 중 70%가 대학교 진학, 그중 3-40% 명문대(NUS/NTU) 진학

나머지 30%는 Polytechnic(3년제), 바로 취업, 해외 명문대 진학


Normal Academic 트랙 (5년, 중)

Normal Academic(5년, 증등교육) → N-Level (4년 차) → O-Level (5년 차) -> 추가 1년 과정 → Junior College 진학 가능 또는 추가 1년 과정 없이 Polytechnic 진학

PSLE 중위 성적 학생들 (학업 능력은 Express보다 낮지만, 여전히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

5년이나 걸리고, 그래도 Junior College에 가려면 1년을 더 공부해야 함.

Junior College 입학이 Express보다 2년 느림.


Normal Technical 트랙 (4년, 하 or 기술 배우려는 학생)

Normal Technical 4년 -> ITE (Institute of Technical Education) 진학 1-3년 or 졸업 후 바로 취업

PSLE 하위 성적 학생들 or 기술 배우는 학생

목공, 요리, 자동차 정비, 전자공학 등 실습 중심/ 졸업 후 취직


글렌처럼 Normal Academic 5년 → Polytechnic 3년을 거친 학생들이 Express 4년 → JC 2년 → 대학 간 학생들과 만나면 나이 차이와 학력 차이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말 12세 PSLE의 파급력이 엄청나다...


재시험? Nope!

여기서 더 충격적인 건, PSLE는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은 수능을 못 봐도 재수, 삼수가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12세에 감기 걸려서 컨디션이 안 좋았다거나, 그날 하필 가족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거나... 그런 건 상관없다. 그 결과가 바로 그 아이의 인생이 된다. 에이미가 말했다.


내 친구 중에 PSLE에서 딱 1점 차이로 Express 트랙 못 간 애가 있어. 그 1점 때문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

80%가 사교육 받는 이유 - "우리 애만 안 받을 순 없어!"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겼다. 싱가포르는 교사를 엄청 존경하고, 교육 시스템도 세계 1위라고 하는데 왜 80% 이상의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을까?

답은 간단했다.


교사와 교육 프로그램은 훌륭해. 하지만 12세에 인생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부모들이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다른 애들이 다 받는데 우리 애만 안 받을 순 없는 거지.

사교육비는 한 과목당 월 20-40만 원, 4과목 다 받으면 월 100-150만 원이다. 더 비쌀 수도 있다. 부유한 집 아이들은 개인 과외에 명문 학원까지 다닐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사정이 되지 않는 아이들은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만 의존한다.

집안 경제력 또한 12세 아이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12세 아이들

이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려주는 슬픈 통계가 있다.

싱가포르 학생의 76%가 시험 불안증을 겪는다 (OECD 평균 55%), 청소년 10명 중 1명이 정신건강 장애, 자살이 10-29세 사망원인 1위.

실제로 일어난 일:

10세 초등학생이 성적 비관으로 자살,

12세 아이들이 PSLE 성적 때문에 극단적 선택

한 Grab 기사는 아들 친구 두 명이 모두 12세에 PSLE 때문에 자살했다고 증언


12세 아이에게 이런 무게를 지울 수 있는 걸까?


변화의 바람? 아직은 미지수

정부도 이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다. 최근에 여러 개선책을 내놨다:

2027년부터 O level test와 N level test 하나로

과목별 수준별 수업 도입

학습보다는 전인교육 강조


하지만 부모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이상 별 소용없다는 게 싱가포르 사람들의 생각이다.

PSLE가 있는 한, 부모들은 절대 포기 안 할 것이다. 내 아이만 뒤처질 수는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글렌은 Normal Academic 트랙을 거쳐 Polytechnic을 나왔다. 대학을 못 갔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파트타임으로 대학교를 다니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12세에 모든 게 결정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게 끝은 아니야. 늦더라도 다른 길이 있거든.

성인이 되어서도 온라인이나 파트타임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고, 정부에서도 40세 이상은 90% 학비를 지원해 준다. 물론 시간은 더 걸리고 힘들지만, 아예 길이 막힌 건 아니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7시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며 시작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과연 12세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할까?
아이들의 행복과 성취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선물하고 있는 걸까?


싱가포르는 분명 교육 선진국이다. PISA 1위, 세계적인 인재 배출, 높은 경제 성장... 하지만 그 이면에는 12세부터 시작되는 잔혹한 경쟁이 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도 점점 싱가포르를 닮아가고 있다. 영어유치원, 선행학습, 초등학교부터 시작되는 사교육 경쟁... 아이들은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들고 있다.

"우리 애만 뒤처질 수는 없다"는 부모의 마음은 싱가포르나 한국이나 똑같다.


하지만 글렌의 이야기에서 희망을 본다. 12세에 정해진 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늦더라도 자신만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또 온다는 것.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1등이 아니라 2등을 해도 괜찮다는 안정감,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선물은 '12세에 인생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진실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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