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날씨 적응기 여름편
제주의 여름은 비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제주는 바람도 많이 불지만, 특히 여름엔 비가 꽤 많이 내린다. 제주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철없던 육지 사람의 우아한 비옷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제주의 집을 지키기로 하고, 서울 가서 짐을 정리해서 오는 길에 백화점에 들렀다. 제주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그럼 예쁜 비옷을 하나 사서 제주에서 입고 다녀야겠다, 우아하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예쁜 핑크색 비옷을 들고 제주 집에 돌아왔다.
마침 비가 온다. 하지만 우산 대신 비옷을 입고 다녀야지 했던 나의 우아한 계획은 제주의 비바람과 함께 날아가버렸다. 제주의 비는 우산도 쓸 수 없을 만큼 비가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내리는 게 아닌가. 비옷을 입고 벗고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비를 피하기 바쁘다.
그리고 우산을 쓰나, 비옷을 입으나 옷이 젖는 건 매한가지다. 우아하게 비옷을 입고, 제주의 비를 맞아보겠다던 내 계획은 철부지 육지 사람의 꿈같은 일이었다.
지금은 우산도 가지도 다니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그냥 맞는다. 우산을 써봤자 바람이 하도 불어서 우산의 의미가 없으니까.
키라의 우아한 분홍색 비옷이 못내 아쉬워 이 비옷을 어디에 쓰지 생각하다가,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여름에 텃밭에 모기가 너무 많아. 잡초 뽑을 때 비옷 입고 잡초를 뽑으면 모기에 물리지 않겠지?' 하고, 그 우아한 비옷을 입고 텃밭에 쭈그려 앉아 잡초를 뽑았다.
내친김에 무농약 귤밭에 청귤 따러 갔을 때도 입었더랬다. 더운 여름날, 모기 안 물리겠다고 비옷 입은 나라는 사람. 땀이 비처럼 쏟아진다. 이건 우비가 아니라 땀복이었다. 사우나가 필요 없다. 그 이후로 이 분홍 비옷은 옷장 어딘가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비옷의 존재가 희미해져갈 때쯤.
삼춘들이랑 귤 따러 다니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비옷을 챙겨오라고 했다. 아, 맞다. 내 분홍색 비옷! 귤가방 안에 이 우아한 핑크색 비옷을 챙겨갔다. 귤 따다 비가 오면 이 비옷을 입겠다고 말이다. 내가 귤가방에서 이 분홍색 비옷을 꺼냈을 때 삼춘들 얼굴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거, 무사?"(이거, 왜?)
삼춘들은 내 은은한 핑크색 비옷을 보고 어이없어 했다. 너 지금 그걸 입고 귤을 따겠다는 거냐? 하는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제주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철부지 육지것이 따로 없었다.
지금도 가끔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아주 예쁜 장화를 신고 다니는 걸 보면 혼자 웃는다. '제주 온 지 얼마 안 됐구만, 곧 그 장화도 안 신을걸~' 하고 혼잣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