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마음 심기 전에

제주어 에피소드

2017년 겨울, 주인 삼춘을 따라 처음 귤 따러 귤밭에 갔던 첫 날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귤가방을 챙겼던 날. 처음 보는 삼춘들 틈에 끼여 귤트럭을 타고 한라산 아래 어느 귤밭에 내렸다. 고개를 들면 바로 한라산이 눈앞에 있었던 중산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처음 보는 젊은 여자아이가 귤을 따러 온 게 신기한지 약간의 경계 그리고 어색함과 함께 나를 보던 삼춘들의 눈빛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귤을 따면서 삼춘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아는 제주어는 '소랑햄수다'가 전부인데, 삼춘들이 쓰는 이 제주어는 외계어 같다. 이때 처음으로 '아, 이게 외국인 노동자의 마음이구나' 하며 알게 되었다.


특히 귤을 따면서 '동드래로 갑써!' 하면 '동드래?' 당연히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니 눈치껏 삼춘들을 따라간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되지, 왜 동드래일까? 북쪽이라고 하면 되지, 한라산 쪽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체 한라산은 어디 있는 거야? 한라산 찾느라 나 혼자 바쁘다.


'동드래'는 동쪽, '서드래'는 서쪽이다. 그러고보니 제주사람들은 늘 동드래, 서드래로 또는 동쪽, 서쪽으로 방향을 말한다. 오른쪽, 왼쪽이라 하면 될텐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젠 나도 동드래, 서드래를 쓴다.


어느 날은 책방 이름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주어 중에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있었다. '기이? 게메... 어게?' 삼춘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제주어를 많이 듣게 된다. '정말? 그러게'라는 공감하는 추임새 같은 말이다. 이 단어들이 예뻐서 내가 책방 이름을 지을 때 '게메책방'으로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고마운 제주사람1에게 '게메책방'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제주 온 지 얼마 안 된 육지것은 '게메'와 '어게'의 뉘앙스 차이를 알 리가 없다. 그런데 고마운 제주사람1이 '게메'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그러게'라고 한다. 그래서 아쉽게도 책방 이름이 되지 못했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단어를 외우는 게 아니구나. 그 안에 담긴 뉘앙스와 감정까지 이해하는 거구나. 그때 처음 알았다.


봄이 오던 어느 날, 주인 삼춘이 책방 앞 귤밭에 오셨다. 책방 앞 잔디밭에 자란 잡초를 보시더니 이렇게 말한다.


"키라야, 이것들 새 마음 심기 전에 어서 뽑아라."


아니, 세상에 이처럼 멋진 표현이 어딨어? 잡초가 뿌리 내려서 자리를 잡겠다고 새 마음 먹기 전에, 뽑기 힘들어지기 전에 어서 잡초 뽑으래. 삼춘이랑 둘이 잔디밭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으면서 아니, 어떻게 그렇게 멋진 표현을 할 수가 있냐고 물었다. 삼춘은 혼자 배시시 웃는다. 그게 뭐가 멋있냐면서. 내가 보기엔 이렇게 멋진 시적 표현이 따로 없다.


'새 마음 심기 전에.' 이 한 마디에 제주 사람들이 땅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었다. 잡초가 뿌리 내리는 것을 '새 마음을 먹는다'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사는 섬. 이들은 땅을 보며, 식물을 보며, 바람을 보며 언어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제주어는 따뜻하고, 직관적이고, 시적이다.


제주어를 알면 알아갈수록 이들이 어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책에서만 봤던 '언어는 그들의 문화이자 삶'이라는 것을 제주에 살면서 몸소 배운다. 처음엔 외계어 같았던 그 제주어. 이제는 그 안에 담긴 제주 사람들의 삶에 나도 서서히 스며들어 가는 중이다.


keyword
금, 토, 일 연재
이전 15화동백꽃 따기 알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