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삶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있는 모든 알람을 끄는 일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뿐 아니라 심지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가야 하는 시간, 샤워하고 욕실에서 나와야 하는 시간,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까지도 핸드폰 속 알람이 끊임없이 울렸다.
말 그대로 시간의 노예, 시간 거지로 살아왔던 도시생활자였던 거다.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제주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알람을 끄는 일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시간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았다는.
그렇게 알람을 끄고 나니 알람없이도 살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주일 정도 지나니, 하는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게 너무 아까운거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본격적인 제주 생활자가 되기 전, 미리 제주 생활자 예행 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지켜야 할 집의 언니가 유럽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내게 제주살이의 기본적인 팁들과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 조언 중 하나가 바로, 시간 관리.
제주에서는 시간 관리를 하지 않으면 뭐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하루가 그냥 휙~ 지나가 버린다는 것. 그때 J언니가 내게 프랭클린 플래너를 추천해주었다. 하루 일과 중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이어리. 물론 서울에서처럼 온갖 알람을 설정해 살지는 않았지만 대신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배우기 시작했다랄까?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책방을 열었다. 제주에서 책방을 하다 보니, 육지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내게 하는 말들이 있다.
제주에 살아서 좋겠어요, 저도 이렇게 느리게 살아보고 싶은데...... 또는 제주에서 여유롭게 사는 게 부럽습니다.
육지 사람들 눈에는 내가 우아한 백조 책방 사장처럼 보였을까? 제주에 사는 건 좋은 게 맞는데, 내가 느리게 사는 것도 여유 부리며 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지금 물밑으로 물갈퀴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이럴 때 내가 그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제주의 삶은 느리게 사는 게 아니고, 여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고요. 삶의 속도를 제가 조절하면서 사는 것이랍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물론 이런 삶의 자세는 당연히 제주 사람들에게 배웠다. 삼춘들하고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귤 따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다. 몸이 돌하르방이 되어버린 듯 꼼짝하기 싫고, 어서 씻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뿐. 그런데 다음날 귤 따러 가면 삼춘들은 어젯밤 동네 지인들이랑 사우나 간 이야기, 잔치 먹으러 간 이야기, 제사 지낸 이야기, 모임 간 이야기들 가득이다. 나는 그때마다 삼춘들에게 '아니, 힘들지도 않아요? 하루 종일 일하고 거기 갈 시간이 돼요?' 라고 묻는다.
삼춘들은 정말 열심히 일하고, 주변인들과 부지런히 어울리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365일 이렇게 살지는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엔 미뤄뒀던 병원도 가고, 미용실에 파마도 하러 가고, 일하느라 못 했던 개인적인 일들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실퍼서 안 했어."(귀찮아서 안 했어) "실퍼서 안 갔어."(귀찮아서 안 갔어) 라고 게으름도 피운다.
쉬는 법을 모르고, 시간의 노예로 살아왔던 도시생활자가 제주에 살면서 삼춘들에게 배운 건 바로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사는 주체적인 삶이었다. 항상 바쁘게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느리게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닌 거다. 때로는 바쁘게 때로는 느리게, 내 삶의 액셀러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스스로 밟으며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제주 삼춘들의 삶 틈바구니에서 배운 진짜 '삶의 속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