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7년 넘게 제주에서 제주 사람들과 귤 따러 다니던 무렵, 고마운 제주사람2가 "키라야, 올해 귤밭 하나 해볼래? 내가 도와줄게." 하고 묻는다. 난 단번에 거절했다.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하는 동업이라고 했다.
책방을 하기 전, 일본 홋카이도로 우프를 떠난 적이 있다(wwoof 우프: 유기농 농장에서 일을 도와주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는 제도). 제주에서 뭘 하면서 살면 좋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홋카이도에서 머물렀던 유기농가는 자급자족하며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집이었다. 내 하루의 일과는 볍씨에 매일 하루에 2번 물 주는 일, 그리고 감자 심는 일이었다. 씨감자를 저울로 재고 알맞게 잘라서 햇볕에 말리고, 땅을 갈고 감자를 심었다.
문장으로 쓰니 참 쉬워 보인다. 엄청 힘들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보낸 2주 동안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그동안 너무 쉽고 편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 생각 없이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매번 마트에서 예쁘게 진열된 채소들만 보았으니, 이 채소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누가 길렀는지 알 리가 없었다.
작물을 키우기 위해 농부의 수많은 발걸음이 흙을 밟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을 텐데 말이다. 그때 잠깐의 경험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과 채소가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농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주에 돌아와 귤농사를 짓는 천상 농부들 틈 사이에 살고 있다. "키라, 밭에 가장 좋은 거름이 뭔 줄 알아?" "발거름이요?" 하고 웃는다. 농부의 발걸음이 농사를 짓는 데 얼마나 중요한 거름인지 이제 누구보다 잘 아니까.
몇 년 전, 제주에 폭설이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비자발적 고립 상태로 집에 머물며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계속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데, 철없는 '나'라는 육지 사람은 눈이 내리는 걸 보고만 있어도 좋다고 헤헤거리고 있었다. 이때 귤밭은 눈으로 인해 발이 폭폭 빠질 정도로 이게 귤밭인지 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부엌에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집으로 들어온다.
"헉!!! 어떻게 온 거???"
내가 키라네 제주 어멍이라 부르는 주인 삼춘이다.
"버스 타고 내려서 걸어서 왔지."
"왜 온 건데요?"
"귤나무가 눈 때문에 무거워서 힘들까 봐. 눈 털러 왔주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 아니,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눈 털어봤자 또 쌓일 텐데, 위미에서 신흥리가 어디라고 오늘같이 눈이 많이 오는 위험한 날 여길 오느냐고 했다.
주인 삼춘은 "그럼 어떻게 하냐! 안 그러면 나뭇가지 다 찢어진다게." 하며 가방에서 묵은 김치와 생선을 꺼내서 건넨다. 이걸로 김치찜 해서 점심 먹으라면서 자신은 귤밭으로 향한다. 그러면서 사진 찍는 걸 싫어하시는 분이 귤나무 눈 터는 거 사진 찍어 달란다. 그렇게 한참을 귤밭에서 눈 털고 와서는 사진 찍은 거 자식들한테 보내달라고 한다. 니네 어멍 이렇게 고생한다고.
나는 그날 삼춘의 뒷모습을 사진 찍으며 생각했다. 이런 농사의 진심, 진짜 농부의 태도와 자세를 귤 따기 7년 차인 내가 감히 어찌 따라갈 수 있을까?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정성을 다하고, 귤 딸 때도 나무 죽는다고, 나뭇가지 조심해서 귤 따라고 소리치는 찐 농부.
'키라야, 땅은 거짓말 안 해. 내가 정성 들인 만큼 내게 수확의 기쁨을 가져다주거든.' 이라 말해주던 키라네 제주 어멍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늘도 새벽부터 귤밭에 가서 하늘을 살피고, 흙을 밟으며, 나무를 들여다보는 이땅의 모든 농부들에게 감사함을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