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그날은 아닐 거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그날은 아닐 거다.
"여러분, 8개월 후에 봐요!"
출산의 그날이 아니라 휴직의 그날이다. 일 시작하고 9년. 쉬지 않고 일만 해왔는데, 육아휴직이라는 긴 휴가를 시작했다. 회사를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다. 가벼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스킵할 뻔했다. 입꼬리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듯, 자꾸만 위로 솟는다.
아기만큼이나 기대된다.
솔직히 말하면, 곧 태어날 아기만큼이나 이 8개월이 기대된다. 아빠가 될 설렘도 크지만, 동시에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살아봤자 젊은 날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 그 귀한 시간 중에서 거의 1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쓸 수 있다니. 이런 기회를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육아휴직 다음날부터 하루가 다르다. 우선 같은 시간을 살아도 피로도가 다르다. 회사 다닐 때는 항상 피곤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에너지가 넘친다. 다시 스무 살이 된 것만 같다. 매일 6시부터 러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평소 보고 싶던 책들을 정주행 한다. 미뤄왔던 집안일을 다 해도 아직 오전이다. 몸은 조금 지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피곤함의 질이 다르다. 피곤해도 상쾌하고 기분이 좋다. 피로와 피곤의 차이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미안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기존 팀 사람들한테는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털어놓자면 이직 준비도 하고 있다.
"꼭 다시 돌아오세요."
몇 번이나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그때마다 걱정 말라고 말씀드렸다.
"제가 어딜 갑니까~"
"네, 그럼요. 돌아와야죠."
하지만 나도 내 살길을 찾아야 한다.
6년 넘게 다닌 회사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빠가 되기 전에,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같은 팀 동료들이 좋아서 아쉽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는 함께 할 수는 없는 법. 만남이 있으니 헤어짐도 있다. 좀 더 집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출퇴근 거리가 짧은 것이 육아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언제라도 어린이집 하원시키고 오려면 1시간 걸려 출퇴근하는 건 큰 장애물이다.
게다가 육아휴직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으니까 용기도 생긴다. 물론 "정말 다른 곳에서도 나를 원할까?" 하는 의심도 든다. 나는 이제 데려다 써먹기 좋은 3-4년 차도 아니고, 불경기에 채용도 얼어붙었다는데,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8개월 후의 일이니 어찌 될지 모른다. 그런 불안은 덮어놓고, 그동안신경도 못 쓰고 있던 포트폴리오를 이틀 만에 후딱 써냈다.
9년 만에 느끼는 '시간'이라는 것
가장 신기한 건 시간이다. 회사 다닐 때는 1시간은 회의 한 번으로 지나가 버렸다. 한 시간의 가치는 딱 그 정도. 퇴근한 후에도 딱 내 시급으로 정도였다. 적은 돈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1시간이 그것보다 더 아깝다. 예전에는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지금은 오후 2시만 되어도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나?" 싶다. 나는 이 육아휴직 기간 동안 더 많은 일을 해내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리고 싶다.
같은 시간을 더 잘 누리기 위해서 되도록 피곤하지 않기로 했다.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체력 관리다. 어른이 새로운 다짐을 하는 첫 번째 방법? 물건사기다. 새 러닝화와 러닝복, 그리고 각종 영양제를 구매했다. 더 밀도 있는 하루를 갖기 위한 투자다.
잊고 있던 자유
아직 휴직을 시작한 지 며칠 안 되었기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잊고 있던 자유를 찾은 이런 감각은 참 소중하다. 아내가 임신 후 매주 글을 써오면서 종종 "시간만 있으면"이라고 말했었는데, 그 시간이 드디어 온 거다. 아마 쫑알이가 태어나면 이런 자유는 더 소중해지겠지. 쫑알이가 일찍 안 나오고 계획대로 예정일까지 잘 기다려주고 있어서 가질 수 있는 휴가이기도 하다. 쫑알이 나오면 한동안 정신없을 거다.
'허니문 기간'이라고도 한다. 일상이 변하는 그런 기간이 있다.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수없이 해봤다. 이번엔 다르다며 말이다. 며칠 안 가서 결국 또 무뎌져서 다시 나약하고 게으르고 피로한 일상을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때도 다시 한번 이런 순간을 만들어내면 된다. 그러면서 조금씩 변하는 게 사람인 것 같다. 어쨌든 오늘도 6시에 일어났다.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