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가가 된 기분으로
등장인물의 이름은 그 인물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름이다. '해리 포터'와 '드레이코 말포이', '성춘향'과 '변학도'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성격과 운명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런데 지금, 36주 차에 접어든 배를 쓰다듬으며 나는 대작가라도 된 듯 내 인생 이야기의 속편 주인공 이름을 고심하고 있다. 다만 이번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태어날 내 아이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책임감이 몇 배로 무겁다.
주변에서는 작명소에 가라고 권한다. 한 친구는 "아이의 운명을 직접 결정하기가 두려웠다"며 전문가에게 맡겼다고 했다. 직접 이름을 짓기는 찜찜하기도 하다. 내가 지은 이름 때문에 아이가 고생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오가는 마음들 말이다.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들을 때 느낄 감정과, 내가 그 이름을 부르며 가질 마음. 획수나 운세로는 재어낼 수 없는 것. 그 아이도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누군가 불러주는 목소리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이름 속에 스며드는 일상의 정서들이 아이를 키워갈 거다.
그렇게 마음먹고 직접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막상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머리가 아팠지만,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해 갔다.
첫 번째: 지뢰밭 피하기
이름 짓기를 시작하면 이름을 하나 떠올릴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이 자꾸 겹쳐 보인다. '지우'라고 생각하면 중학교 때 앞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민서'를 떠올리면 회사 동료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름이란 게 참 묘하다. 글자 몇 개로 한 사람의 전체 인상을 담아내니까.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부정적일 때도 있다. 아무리 예쁜 이름이라도 불쾌했던 기억이 연결되어 있으면 그 이름은 물론이고 비슷한 느낌의 다른 이름들까지 선택할 수 없다. 그런 부정적인 연상을 가진 글자와 이름들을 먼저 필터링해서 제외해 보자. 그래야 정말 순수하게 내 아이를 위한 이름을 고를 수 있을 테니까.
두 번째: 성씨 특성 파악하기
성씨에 따라 이름 짓기의 난이도가 완전히 달라진다. 내 성씨는 '김'이다. 가장 흔한 성씨라서 평범한 이름을 지었다가는 동명이인이 넘쳐난다. 유치원에서 "김서연!" 하고 부르면 세 명이 동시에 돌아보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성에 따라 어울리는 이름의 성격도 달라진다. '한', '정', '윤'과 같은 성씨들은 부드럽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반면 '김'씨는 너무 딱딱한 느낌이다. 그래서 너무 단단하지도 너무 부드럽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의 균형감이 필요하다.
세 번째: 유행과 개성의 균형점 찾기
요즘 유행하는 이름들을 찾아보면 서연, 하준, 도윤. 예쁘고 부르기 좋은 이름들이 많았다. 실제로 요즘 트렌드는 부르기 쉬운 이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대부분이 부드럽고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반대로 독특하고 특별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내 아이만의 고유한 이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하지만 너무 특이해서 아이가 평생 이름을 설명해야 하거나, 또래들 사이에서 튀어 보일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적당히 개성 있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그 미묘한 지점을 찾는 게 관건이다.
네 번째: 성명학을 적당히 참고하기
성명학을 그다지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불길한 이름이라고 하는 이름을 내 아이에게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한글 이름을 먼저 고른 후에 거기에 맞는 한자를 찾으면서 성명학을 어느 정도만 참고하기로 했다. 최소한 "이 이름은 안 좋다"는 말은 듣지 않을 정도로만. 완전히 성명학에 의존하지도 않지만 아예 무시하지도 않는 선에서 찜찜함만 없애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아예 고려하지 않을 거라면 애초에 찾아보지도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이미 들여다본 이상 어느 정도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도구 활용하기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큰 도움을 받은 건 내가 취미로 개발해서 만들어둔 '아기이름 연구소'라는 앱이다. 임신도 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서 만들어둔 건데, 이제야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특정 글자가 꼭 들어갔으면 하는 이름이 있을 때 그 글자의 위치를 정해서 검색할 수 있고, 성별이나 인기도, 발음별로도 필터링도 할 수 있다.
괜찮은 글자가 생각날 때마다 "이 글자와 어울리는 이름은 뭐가 있을까?" 하고 검색해 보면서 여러 후보들을 정리할 수 있거, 마음에 드는 이름 후보들을 찾았을 때는 각각의 인기 순위도 검색해 봤다. 너무 흔한 이름인지, 아니면 적당히 개성 있는 이름인지 가늠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앱을 통해 이름 확인하면서 "이 정도면 적당하겠다" 싶은 선을 찾아갔다.
결국 어떤 이름으로 정했는지는 여기서 말할 수 없지만, 흔하지 않으면서도 평생 잘 어울리게 쓸 수 있을 이름을 고민해서 정했다. 잘 정했다 싶기도 하지만 아직도 고민이다. 내가 한 사람의 이름을 정하고, 그 사람의 정체성과 인생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개입해도 되는 걸까?
앞으로 육아도 두려워진다. 이름 하나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때마다 이런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될 것 같다. 태어나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를 테고, 그만큼 부모가 그 아이의 세계의 전부가 될 텐데. 내가 내 아이의 세계가 되어도 괜찮을까. 이름 하나 짓는 일조차 이렇게 깊은 고민이 되는 걸 보니, 내가 이런 큰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