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눈물
아주 오랜만에 친한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만난 별아이는 아주 신나게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네 명이서 신나게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뭉클함마저 느껴지려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뛰어온다. 불길한 예감에 뛰어가 보니, 그 아이들 중 한 명의 이마에선 핏방울이, 아니 핏줄기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다 내 잘못 같아서 그래.
그냥 내가 잘못해서
그게 미안해서
눈물이 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는 (세상 다 아는) 거짓말을 거짓말이 아닌 관용구로 만든 우리 선조들의 마음을 극히 공감하는 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눈 깜짝할 새 두 번 넣어도 안 아픈 둘째 맘. 그런 엄마가 되고서 격한 공감을 하게 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앞서 언급한 관용구, 그리고 두 번째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 말이다.
고백하자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한 것들 사이에서 가끔 두려운 것도 생겼다. 바로 가족들의 안위. 안전. 가족이라는 생애 비할 데 없는 소중한 존재들이 생기면서 두려움도 생긴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소중한 것을 잃을까 두려워지는 그 동전이 주머니 속에 담긴 것이다.
별아이를 낳고 복직한 첫 주 금요일. 퇴근길의 장문의 카톡엔 별아이의 쇄골 골절 소식기 담겨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퇴근한 그날, 나는 아이가 잠든 후 불을 끄고 울었다. 매일 앉던 소파에서 매일 신던 양말을 신다 앞으로 짚은 손에 쇄골이 골절되다니. 그때 별아이는 만 두 살이 안됐었다. 너무나 작은 몸에 어깨를 감싸 안은 깁스를 보니 왈칵했지만 엄마는 울지 않았다. 많이 아팠지? 무서웠겠다. 하지만 병원에서 정말 용감했어. 많이 걱정되셨죠? 괜찮을 거예요. 더 크게 다친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이런 이야기들을 하느라 굳센 얼굴과 괜찮은 얼굴뿐이었을 거다.
토닥토닥 아이를 재우고
밤의 고요가 밀려들 때가 되면
불 꺼진 방에 누운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엄마의 엄마가 운 적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맘이 왈칵할 때가 많은 건지. 아이가 다친 그 자리에 내가 없었어도 죄인이 되는 건지. 왜 미안한 마음이 이렇게나 쏟아지는 건지 논리적일 수 없지만 그 마음을 따라간다. 그냥 미안함을 그대로 둔다. 분명, 그녀도 불을 끄고 눈물을 흘리셨을 테지.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다음날, 작은 몸을 안고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너무 작은 몸집의 아이는 처음에 울었다고 한다. 엄마와 손 꼭 잡고 간 이 날은 앙다문 입에서 결의가 느껴질 정도다. 아기-지금 생각해보면-는 꾹 참고 엑스레이를 잘 찍었다. 너무 고맙고, 또 미안했다.
모든 엄마들에게 이런 상황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이진 않다. 결국, 이런 상황들이 크고 작게 다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인데, 나는 꼭 이렇게 진심을 다해 말해주고 싶다.
많이 놀랐지,
네가 놀랐겠다.
그만하길 다행이야.
괜찮다,
잘 낫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너의 잘못이 아니야.
괴로워하지 마.
엄마들의 공통점은 마음이 괴롭다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아이가 아픈 모습을 보면서 맘이 안 괴로운 엄마는 없다. 더불어, 현실은 아래와 같을 것을 알기에-완벽히 개인차가 있고 가정하는 것이니 오해하지 말길-그래서 진심을 담아 말해주고 싶다.
- 엄마 본인 : 그냥 괴롭고 그냥 죄스러움. 미안함. 그냥 눈물 남
- 친정엄마: 왜 그랬냐부터 엄마보다 더 먼 미래까지 더 넓게 걱정하시는 마음이 (엄마보다) 깊으심
- 시부모님: 너무 미안해하시며 속상해하시며 그런 슬픈 마음이 더 깊으심
- 남편 : 그냥 아이가 아픈 게 다인 줄 앎. 아이가 웃으면 따라 웃음. 엄마가 펑펑 울고 힘들다 고백할 때까지 엄마의 마음을 잘 모름. 근데 그런 사람이 필요함. ( 모두가 깊어질 필요가 없음. )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조금 부족하게 잘 모름. 임신할 때부터 모르는 게 일관적이지만 둘째 이후부터는 굉장히 잘 알게 되는 특징. 참고로 모를 수도 있음. 근데 객관적임.
보통 아이의 잘됨과 잘못됨의 원인을 엄마에게서만 찾는 요상한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한다. 그 논리가 원래 존재했던 터라 이미 엄마의 마음속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이 때문에 -모성애와는 별개로- 마음속 깊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치시키는 논리가 ‘그냥’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논리의 한편으로 생기는 미안한 마음 때문에 엄마는 죄인이 되지 말라는 얘기다. (방관의 범위에서는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범위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부단히 노력한다. 내 아이에게 최선을 다 하는 방식이 다를 뿐 부모는 육아에 많은 에너지들을 쏟는다. 그 고귀한 작업이, 이런 노력이 필연적이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로 일순간에 죄스러워지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게 부모의 마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마음은 부모의 선택이고 강요될 수 없다. 그렇기에, 아이가 다치고 생각지 않은 결과를 마주할 때 엄마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꼭 해주고 싶은 위로이기도 하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씩씩한 별아이의 친구는 흘러내리는 피를 닦고 지혈을 하며 긴급하게 병원으로 갔다. 다행히 남편이 바로 옆에 있어서 차를 태워 함께 갔다가 왔는데 아이도, 엄마도 놀란 상황에 놀란 아이 달래느라 하얗게 질린 엄마의 얼굴에 토닥토닥 괜찮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고 한다. 흘린 아이의 피를 닦고 피 묻은 엄마의 옷을 챙기면서 토닥토닥 괜찮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아이를 달래고 진료를 받느라 그럴 겨를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집에 왔다는 전화에 괜찮은지, 챙겨둔 짐 갖고 가겠다 했는데 다시 전화를 들었다. 얼마나 놀랬을까, 일단은 푹 쉬라고. 급한 거 없으니 엄마도 아이도 푹 쉬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급한 내 맘 접고 쉴 수 있게 내일을 청했다.
당신의 맘이 무겁겠지만,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저의 맘도 무겁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로 고된 오늘 하루, 푹 잘 쉬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