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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라a Oct 20. 2021

비를 좋아하면

싫어지는 날이 없다

 어릴 때 어느 순간은 흐리면 기분이 좋지 않고 맑으면 기분도 좋아지는, 날씨를 쫓아 내 마음이 정해지던 때가 있었다. 왠지 비는 눈물 같고 흐린 하늘은 흐린 마음 같았다. 그냥 흐린 날은 찌푸린 얼굴 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한여름 대낮에 소낙비가 한참을 내렸다. 달걀도 익히는 아스팔트의 열기 위로 시원한 빗줄기가 한참을 때렸다. 그리고 비가 멈춘 후 창문을 통해 본 바깥은 마치 하늘의 구름이 아스팔트 위로 놀러 온 듯 수증기가 온통 덮어 어린 내 눈엔 지금의 우유니 소금사막과 같이 신기하고도 멋진 광경이었다. 장관이었다.

 별아이는 밖에서 노는걸 아주 좋아한다. 뛰는 게 신체 발달의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엄마는 5분 거리의 마트를 두 번에 나누어 뛰어 도착하게 하거나 10분 거리의 교회 가는 길은 마라톤을 연상케 하는 질주를 한다. 이건 별아이가 밖에서 노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밖에서 뛰는 걸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다 보니 비가 오는 날엔 운동화를 신고 실컷 뛰지 못하기에 잠깐 찌푸린 얼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물웅덩이에 첨벙거리며 노는 신남이 점점 커졌다. 비록 엄마는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자연스럽게 웅덩이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는 별아이를 보며 악 소리를 지르긴 하지만, 그래서 사실 웅덩이에서 못 놀게만 안 하면 비를 싫어할 이유가 없는 별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본 걸까, 엄마 비가 꼭 눈물 같아요. 장난기를 쏙 빼고 아이가 말한 눈물과 같은 감성으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마음 한편엔 꼭 눈물 같은 비 말고, 슬픔의 표현인 비 말고 다른 비를 알려주고 싶은 맘이 역동했다. 또 한 번은 천둥 번개가 막 치더라. 아이는 무서웠던 건지 엄마를 찾는데 그 역동한 맘에서 비롯된 걸까, 토닥토닥 달래어 이불로 가지 않고 토닥토닥 달래어 창문 옆 소파로 간다. 이 엄마는 이 번개를 꼭 봐야 한다며 구경하자 꼬신다. 얼떨결에 아이는 두려움을 뒤로하고 따뜻한 차 두 잔을 우려내어 가지고 온 엄마와 어두컴컴한 거실에 앉아 번개 구경을 했다. 딸아, 두려워 말고 마주하면 두려움 자체가 예술이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앉아 천둥 번개의 향연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딸아, 그거 알아?
비를 좋아하면 안 좋은 날이 없어.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아.
그럼 하루하루가 안 즐거운 날이 없더라고.

 정말이네 엄마? 별아이와 나는 큭큭거리며 비를 바라봤다. 엄마는 실제로 맑은 날 /흐린 날 통장을 기획한 적이 있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가산 이자를 주고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가산 이자를 주고. 대신 1일 1 계좌만 살 수 있는 아이들 대상의 적금 상품을 제안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제안서를 제출하지 못했었지, 하며 저축 얘기도 했다. 비 오면 비 오는대로 이자받아 좋고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분 좋게 저축할 수 있을까? 하며 속닥속닥 이야기도 나눴다. 번개의 모습과 천둥의 소리 속에서 호로록호로록 마시는 바닐라 루이보스는 그 어떤 곳에서 마셨던 것보다 향기로웠다.

 정말 별아이는 비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 날은 타요의 ‘비가 내려요.’를 흥얼거리며 장화를 신고 비를 맞기 위해 나가기도 했고, 어느 날은 차 안에서 내리는 비를 보며 비가 흐르는 모습에 즐거워했다. 홍콩 여행 중 디즈니 랜드에서도 억수 같은 비를 뚫고 놀아도 아쉬움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신나 너튜브로도 남겼더랬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좋아하고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오는 대로 좋아하니 하루하루가 신날 수밖에. 그렇게 비는 눈물의 표현뿐만 아니라 기다려온 신비가 되었다. 사락비이든 폭풍우든 우리에게 비는 기다려지는 신비로움이었다.

 오랜만에 여행을 갔다. 첫날에는 태풍이 오듯 일 년 중 가장 비가 많이 오더니 그칠 생각이 없다.

 아빠, 비 구경할래요?

별아이의 리드로 잠잘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임에도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빗소리 만으로도 밤중의 정적이 화려하다.

입김으로 발가락을 찍기도 하고 와인과 쥬스를 마시며 비를 보며 앉았다

 소곤소곤 비가 내린다. 맑은 날 걷기 좋은 곳으로의 여행이었지만 가족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내리는 비 자체를 보며 각자의 감상에 잠긴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소곤소곤 비가 내린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을 기분 좋은 설렘으로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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