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배추 김치
어머니가 보내주신 묵은 김치가 동이 날 무렵부터 고민이 많아진다. 금배추라 담가먹기엔 부담스러운 가격이기도 하고 만사가 귀찮은 데다 가을을 탓하며 부쩍 게을러진 이유도 있었다. 가벼워진 김치통의 뚜껑을 열자 남아있던 마지막 한 포기.
냉장고 속 든든한 지원군이 없어지는 아쉬움을 달래며 마지막 남은 귀한 김치를 어떻게 맛있게 먹을지 아이들과 고민하다 두부김치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약불로 예열된 냄비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마늘을 넣어 볶다가 그 위에 돼지고기를 넣는다. 달달 볶아진 돼지고기의 육즙이 풍부해지면 양파랑 김치를 넣고 매실청과 설탕,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 뚜껑을 덮어 한소끔 더 볶는다. 맛있게 다 볶아지면 그위에 얇게 송송 썬 파와 통깨를 넣어 마무리한다. 커다란 접시 한가운데에 볶은 김치를 소담하게 담고 따끈따끈한 두부를 썰어 접시 가장자리에 두르면 끝.
두부김치는 우리 네 식구 모두 잘 먹는 음식 중에 하나다. 작은 녀석도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배추김치가 더 아쉬워진다. 이제 당분간 못 먹을 메뉴다.
“이제 배추김치 없어서 어쩌지?”
입에 든 두부김치를 오물오물 씹으며 식탁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편을 향해 말한다.
“혹시 그럼 양배추는 어때?”
돌아온 그의 말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오~ 한번 담가볼까? 괜찮을 것 같은데!”
한 통에 사천 얼마쯤 주고 산 양배추.
한입 크기로 썰어서 베이킹 소다와 식초물에 담가 둔 뒤 잘 씻어서 소금을 살짝 뿌려둔다.
양파와 마늘 그리고 생강 조금, 당근과 사과를 갈아 새우젓과 액젓, 매실청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어 양념장을 만든다.
물기 뺀 양배추 위에 양념장과 쪽파를 넣어 버무리다 통깨를 넣어 마무리하면 양배추 김치가 된다. 찹쌀풀이나 밀가루풀을 생략해도 되니 과정도 매우 간단해진다.
요즘 우리 집 식탁에 빠지지 않는 양배추 김치는 배추김치가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인기가 좋다.
양배추 자체에서 나는 달큼한 맛과 김치 양념장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아삭 거리는 식감도 일품이다.
볶음밥은 물론 카레에도 넣고 떡볶이나 강된장에 곁들여 삶아 먹기도 했던 양배추, 아이들에게 일부러 양배추를 먹이려고 애쓴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닌데 김치를 이렇게나 잘 먹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예전에 외국에 살 때 일본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놀러 온 적이 있다. 오랫동안 한국음식을 접하지 못했을 거라 짐작하고 친구한테 맛있는 총각김치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스를 갈아타며 멀리 한인타운까지 오갔다. 그리곤 네덜란드에서 재배해 수입해오는 알타리무를 예약해서 받아와 어렵게 총각김치를 담근 기억이 있다. 처음 담가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구한 재료라서 당시 즐겨보던 한국 요리 블로그를 보면서 진지하고 신중하게 그대로 따라 했다. 두근두근 설레며 실온에 두고 기다린 3일, 정말 말도 안 되게 맛있었던 총각김치였다.
그 친구도 맛있게 먹어주니 고마웠고 뿌듯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총각김치를 맛볼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좋은 재료를 더 많이 넣어 더 맛있게 만들 욕심. 욕심을 부릴수록 다른 결과를 초래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잘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이후로 한동안은 처음 담갔던 총각김치의 맛은 볼 수가 없었다.
푹익은 배추김치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는 무궁무진하다. 바게트 빵 위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펴 바르고 볶음김치를 얹혀 아보카도와 치즈를 토핑 해서 오븐에 구워도 맛있는 한 끼 요리가 된다.
무궁무진한 배추김치처럼 양배추 김치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치를 담가 먹은 지 십 년이 넘으니 이제 좀 알 것 같다. 욕심을 살짝 내려놓고 기본에 충실하면 맛은 그냥 따라온다는 것.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요리뿐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의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담근 지 얼마 안 된 양배추 김치를 푹 익을 때까지 먹게 된다면 먼저 두부김치처럼 돼지고기랑 볶아서도 한번 먹어봐야겠다. 양배추 두부김치는 과연 어떤 맛일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