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꼭 안 읽어도 된다?
혹시 '나'에 힘을 잔뜩 실었던 지난 글을 보고 오신 분? 사적인 얘기와 속 깊은 고민을 듬뿍 담았던 만큼 주변으로부터 여러 응원의 메시지를 받아 감사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민망한 감도 있었다. 말은 안 해도, 누구나 다 진지하게 '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갈 텐데, 그 당연한 걸 호들갑 떨며 강조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멋쩍기도 했다. (어떤 글이길래...궁금하다면)
그.래.서.
이번엔 힘을 좀 빼고, 잊을만하면 다시 떠오르는 흥미로운 논란거리로 돌아왔다. 그건 바로 '독서'.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말해 보건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 어른들로부터 단 한 번도 책 읽기를 강요받지 않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체론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필요한 교양을 쌓으라는 실용적인 이유로, 때로는 책 속엔 우주만물의 이치가 담겨있어 중요하다는 그럴싸하지만 막연한 이유로(?) 우리 사회는 독서를 권해왔다.
그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 준 건 책으로 성공을 경험했다는 무수한 사례들. 누구는 인문학 서적 100권을 읽었더니 국어 공부를 따로 안 하고도 수능에서 100점을 맞았다더라, 누구는 책 한 권으로 각성한 뒤 사업을 벌여 100억을 벌었다더라 등 책과 엮인 성공담은 끝도 없다. 그런 부류의 드라마틱한 사례들이 수세기에 걸쳐 쌓이고 쌓인 끝에, 우리는 책이란 거대한 신화를 추앙하는 분위기 아래 살게 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책을 읽으라고 종용했던 때를 생각해 보자. 돌이켜 보면, 책이 '왜' 좋은지에 대해 제대로 납득할만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가령,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는 뇌 작용에 관해 과학자들이 실험한 결과, 책을 읽는 이의 뇌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얘기에 진정 고개가 끄덕여지던가. 아니면 "뭘 그리 따져 물어, 책으로 성공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까..?"라는 식의 결과론만을 내미는 이들에게 설득당하기엔 왠지 자존심이 상했던 적은 없는가.
반골 기질이 다분했던 고교시절, 나는 그런 반발감에 괜히 더 책을 기피하기도 했다. 다수가 따르는 성공 방정식을 깨보겠다는 맹랑한 패기가 솟아났던 탓도 있었거니와, 책을 안 읽고도 잘만 산다더라 하는 얘기들을 간간이 접하며, 나도 그 힙한 소수에 껴보겠다는 허세 어린 다짐도 한 몫했다.
그렇다면 그때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지금껏, 과연 나는 계속 책을 멀리해 왔을까? 그러고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을까?! 잠시만. 성급히 당사자성부터 짚고 넘어가기에 앞서, 먼저 한 유튜버가 책 읽기의 효능에 관해 몸을 사리지 않고 벌인 인상적인 사회 실험부터 하나 보고 가시겠다.
하도 많은 자기계발러들, 성공한 사업가들이 책을 읽음 성공이 보장된다는 식으로 말해온 것에 반신반의했던 유튜버 '타임프리'는 인생의 소중한 1년을 투자해 책 읽기에 전념해 본다. 그렇게 1년 간 읽은 책은 무려 143권. 그 결과, 그는 독서 전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 1년 만에 삶이 180도 뒤집히진 않았더라도 분명 독서로 어떤 터닝 포인트쯤은 마련했겠지.' 안타깝게도, 그는 독서를 통해 심지어 별반 도움조차 받지 못한 것 같다고 밝혔다.
드디어 등장한 걸까. 늘 열세하던 '독서무용론'의 불씨에 기름을 부어줄 스타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단 실험 당사자(타임프리) 스스로 그런 방면의 스타가 되기를 바랄 리는 결코 없을 것이다. 영상을 살펴보면, 그는 독서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이유를 책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서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 진단한다. 그렇다. 썸네일은 어그로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지적한 독서 방법의 이슈는 누구에게나 독서가 무조건 유익하기만 하다는 맹목적인 독서 신격화에 경종을 울린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독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시간낭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해 준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뭘 어떻게 읽었길래.
문자 그대로 '그냥 읽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 책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다방면으로 내용을 고민해 보고, 자신의 삶 속에 이를 끌어와 적극적으로 탐구하지 않으면, 책 읽기도 그리 유익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 타임프리님 스스로 지적했던 자신의 독서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1년 간 분야를 막론하고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자신의 현실과 별 연관없는 책들, 필요를 느끼지 못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큰 도움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그 책들이 언젠가는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나. 이와 관련해 개그맨 겸 요식업 사업가이자, 이제는 베스트셀러 작가로 더 유명한 고명환 대표는 독서를 통해 우리 뇌가 '엉망진창이 되는 현상'을 긍정한 바 있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접하며 인풋을 잔뜩 넣기 시작한 뇌를 흙탕물이 된 봄날의 저수지에 비유한다. 비록 혼탁해진 저수지에서 당장은 낚시를 할 수 없더라도, 때가 되면 자연스레 부유물들이 가라앉고, 물이 맑아진 뒤엔 생명의 기운이 가득한 생산적인 낚시터가 된다는 것이다.
탁월한 비유다. 분명 책을 통해 얻은 정보와 감상은 유용한 도구가 되기는커녕, 종종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다. 여기저기서 수집된 정보들 가운데 무엇 하나 머릿속에 제대로 남는 건 없고, 어떨 땐 엇갈린 주장들이 충돌해 무엇을 신뢰할지 선택하기조차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이 혼탁한 상태를 잘 묵혀두기만 했을 뿐인데도, 간혹 그것이 뜻밖에 선물처럼 되돌아오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는 무의식 깊은 곳에 차곡차곡 가라앉은 지적 단서들이 서로 연결되어, 불현듯 일상의 문제를 해결할 창의적인 자양분으로 떠오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누구나 책을 통해 여러 정보를 한번 입력해두기만 하면, 뿌연 흙탕물이 어느새 맑은 담수가 되고, 그 속에서 유익한 아이디어를 길어 올릴 수 있나. 만약 이렇게 고대표의 엉망진창론을 해석했다면, 명백한 오판일 것이다. 책에서 정보를 얻는 것만큼이나 그가 강조하는 건 책을 통한 '사유‘다. 아니, 어쩌면 책은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일 뿐이고, 그보다 더 본질적인 건 자신에게 입력된 정보를 깊이 사유하는 과정 그 자체다. 그는 여러 책을 거쳐 훈련하듯 사유하기를 반복하며, 나만의 이유와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삶의 선순환을 이끈다고 주장한다.
종합해 보건대, 앞선 두 사례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렇다면 더더욱 꼭 책이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오게 한다. 깊이 있는 사유를 가능케 하는 양질의 정보를 수혈받을 수만 있다면, 그 수단이 반드시 책일 필요는 없단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은 특히 요즘처럼, 책이 아니더라도 내실 있는 텍스트나 영상 콘텐츠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층 힘을 받게 된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최신 정보를 잘 편집한 뉴스레터며 인스타그램 피드는 물론이고, 기깔나는 영상미를 더해 전달력이 뛰어난 유튜브 영상들까지. 이 가운데 좋은 정보만 잘 소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는지.
그래서, 내 결론은 책은 꼭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읽은 게 맞다. 책은 꼭 읽어야만 한다. 어쩌면 단편적인 지식이 넘치는 이런 시대일수록 더더욱. 논의의 방향을 불쑥 뒤집으며 내가 꺼내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체계'다.
한 권의 책은 각종 정보의 집합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작가가 정교하고 순도 높게 다듬은 하나의 '사고 체계'라는 점이다. 우리는 책을 읽는 과정에서 단순히 정보를 제공받는 것을 넘어, 그 내에 구축된 거시적인 체계를 음미하며 사고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시야를 확보하게 된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도 하지만, 단언컨대 신도 엉성한 체계 속의 디테일에는 머무를 수 없다. 책은 참신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와 서사의 체계를 익히기에 가장 훌륭한 산물이다. 책을 출간한 작가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세상에 자신만의 차별화된 이야기를 만들어보겠다는 자의식을 한 권의 책으로 펼쳐낸 사람들이다. 이들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고심 끝에 세운 단단한 언어적 구조를 체험해 보는 과정은 단순 지식 몇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복기해 보면, 나 역시 문화예술 행사의 기획자로서 이룬 크고 작은 성취들에 대한 대부분의 지적 단서들을 책 바깥에서 얻긴 했다. 업무 특성상 오프라인 경험으로 큰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았고, 트렌드를 예민하게 반영한 아티클이나 인플루언서의 포스팅도 자주 참고했다. 하지만 이런 단편적인 지식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설득력 있는 제안서로 묶을 때 정말 중요했던 건, 논의의 '구조'를 탄탄히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조만 제대로 잡혀 있으면, 설령 시간이 모자라 자료 조사가 빈약하거나 디자인이 구린 결과물을 제출하더라도, 이해관계자들을 수월하게 내 편으로 끌어올 수 있었다.
구조를 짜는 노하우는 특정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음미하는 습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습관을 체화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구조를 짜보는 '글쓰기'일 것이다. 글쓰기는 앞서 타임프리님과 고명환 대표가 강조한 '사유'의 연장선에 해당될 텐데, 이는 두서없이 생각을 나열하는 메모와는 확연히 다르다. 독자를 염두에 두고 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조직하는 과정은 내 아이디어를 한발 떨어져 객관화해 살피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메모와는 차원이 다른 지적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책을 읽는 경험을 넘어, 일종의 책이 되는 경험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SNS 포스팅이나 댓글로 올리는 짤막한 단상이 아니라, 최소 A4 1장 이상의 분량으로 내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담아내는 경험은 사실상 한 권의 책을 압축적으로 집필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이는 그런 글들만 수십 편을 모아 몇 백 페이지 분량의 단행본으로 엮어낸 분들껜 다소 실례되는 말일 수 있겠다. 그러나 한 편의 글을 씀으로써 내가 한 권의 책을 쓴 작가가 되었단 혼자만의 귀여운 착각에 발을 담가보는 건 나름의 순기능이 있다. 작가가 되었다는 의식적인 보상은 책 읽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도 높고 지난한 글쓰기라는 노동에 기꺼이 뛰어들어볼 만한 확실한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글을 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좋은 인풋이 고갈된 가운데, 누구나 할 수 있을만한 상투적인 생각들을 계속해 글로 옮긴다면, 이는 안 쓰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나 역시 이 부분이 늘 딜레마다,,내 글도 뻔한 동어반복에 그칠까 두려운 마음,,) 그런 의미에서 책 읽기는 더 좋은 책이 되기 위한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좋은 지적 자원을 수혈받을 뿐만 아니라, 내 글쓰기 전반을 성찰하는 계기가 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지금껏 글을 쓰며 무신경하게 뱉은 관습적인 표현은 없는지, 안일하게 뭉뚱그린 맥락은 없는지 등 내 문제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나보다 더 노련한 작가들의 생각의 체계가 유려한 활자로 정리된 책을 정독할 때다.
다시 이 글의 초반부에 스스로 던져둔 질문에 답해보겠다. 일단 나는 아직 삶의 성공을 운운할만한 단계에 와있진 않으나, 30년을 조금 넘게 살며 분명해진 건 하나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도저히 찾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어릴 때 들어왔던 것 처럼, 책 속에 모든 답이 있다는 식의 교조적인 메시지를 남발하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책의 주변부를 맴돌다 보면, 높은 확률로 내 삶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동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은 자신이 그토록 찾고 싶었던 삶을 향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드러나기도, 자신의 삶 속에 끌어들이고 싶었던 하나의 습관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나의 경우, 책을 읽고 또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되고 싶다는 하나의 답을 찾게 되었고, 더 좋은 책이 되기 위해선 하루하루 스스로가 책이 되는 삶을 이어가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탓에, 글쓰기란 이 얄궂고도 숨 막히는 습관을 삶에 들이게 되었다.
그렇담 10년 후, 너무 길다면 5년 후 다시, 스스로 책이 되기를 선택했던 한 삶이 어디에 당도해 있는지 논해 본다면 어떨는지. 그때 내가 서 있는 위치를 두고 성패를 판단하는 것 역시 나 자신이라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려나. 그럼에도 확실한 건, 지금으로선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다. 나 아닌 누구라도, 5년 후의 내 삶을 두고 실패라 말하는 미래를.
추신)
2022년 국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아시는가?! 이 책의 존재를 몰랐거나 잊고 있었던 분들이라면, 정말 꼭 한번 전문을 읽어보시길 강추한다. 이 책이야말로 왜 우리가 책의 하이라이트만을 담은 압축본이 아니라, 책을 통으로 소화하며 그 구조와 디테일을 감각해야만 하는지를 여실히 입증하는 걸작이다. 읽기 시작한다면, 분명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독파하게 되리라 장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