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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w We C Feb 23. 2024

안광이 미래다

남는 건 콘텐츠의 눈빛뿐


우리는 무얼 응시하는가 (feat. 멍 때리기)


   고백건대, 나는 하루 중 상당 시간 한 곳에 시선을 꽂은 채 멍을 때린다. 정확히 말하면, 멍 때리지 않을 수 없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당장 어디서부터 생각을 정리해 나갈지 모르겠어서.


  이건 과잉정보로부터 오는 일시적 멘붕이나, 빠른 변화의 속도에 도저히 발맞출 자신이 없는 데서 오는 위기감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물론 멍을 때리다 보면 간혹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경우들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감정 때문에 멍을 때리진 않는다.


  그렇다면 멍을 때리는 이유는,


  성난 황소처럼 달려드는 과잉정보를 노련한 투우사처럼 침착히 다루기 위함이다. (다소 우악스러운 비유지만) 겉보기엔 두려운 현실을 회피하는 듯 보일지언정, 실은 생각에게 스스로를 정리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최근 화두로 삼고 있는 주제에 관해 먼 과거의 기억부터, 최근의 기억까지 소환해 이리저리 '조합(blend)'해볼 수 있도록. 때로는 경험적인 기억 외에도 선험적인 지식이나 잔상에서 흥미로운 걸 이끌어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거다.


  이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치면 로딩 시간을 주는 것일 텐데, 생각의 로딩(멍 때리기)은 특정 결괏값을 도출하라는 명령에 따라 진행되지 않는다. 경험상 오히려 그 순간만큼은 어떠한 목표도 없어야,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한 목표를 세운 채, 거기에 끼워 맞추듯 생각할 땐 사고의 폭이 제한되는 한편, 목표 없이 넋을 놓고 생각이 가만히 흐르게 내버려 두다 보면, 높은 확률로 이질적인 생각들끼리 만나 참신한 아이디어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나 멍 때리기에 대한 내 개똥철학의 요는 알토란 같은 아이디어를 낳는다는 '효용성'에 있진 않다. 그보단 멍한 상태에서 무작위로 떠올린 생각들이 쌓여감에 따라, 우리 자신이 '본질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보게 됨에 주목한다. 혹자에겐 이 말이 알맹이 없는 선문답 정도로 보일지 모르나, 개인적으론 이런 프로세스의 필요성을 최근 크게 깨달았다.


  얼마 전, 쌓일 대로 쌓인 나의 멍카이브(?)를 한 화면에 주욱 늘어뜨려 놓고 살펴봤다. 멍을 때리다 중간중간 메모해 뒀던 단상들 간에 상관관계는 없을까. 희한하게도 전혀 다른 내용의 메모들 사이에서 공통된 표현, 패턴화 된 의식의 흐름은 물론, 반복된 바람이 묻어났다.


  한 사람이 썼으니 당연한 걸 지도 모르지만, 이로부터 새삼 '나다운' 지점들을 관찰하며, 늘 물음표로 남겨뒀던 나에 대한 의문들이 일부 해소되는 듯했다. 그러면서, 여태 오감으로 지각해 온 것들이 나의 어떤 본질적 욕망과 만나 왔는지, 또 그 본질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실천이 뒤따라야 할지, 어렴풋 보였다.


  초점을 잃은 채 멍과 멍 사이를 헤맨 끝에, 드디어 내 초점이 어디서 맞춰지는지를 확인했달까.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 그 지점을 명확히 묘사할 최적의 언어를 찾진 못했으나, 분명한 건 있다. 각자 방법은 다를지라도, 그런 탐색의 과정이 우리 창의노동자들에겐 '주기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우리 곁엔 너무도 많은 콘텐츠들이 다채로운 '형식'으로, 자신만의 '태도'를 전하는데 여념이 없고, 미처 소화 못한 경험의 찌꺼기를 무턱대고 쌓아 뒀다간 탈이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가만히 두면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응시하는 시선 넘어, 우리 무의식이 진짜 무엇을 응시해 왔는지. 우리는 진정 어떤 형식을 추구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지.  



형식과 태도로 본 '예술'과 '브랜드'


  모든 콘텐츠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element)를 두 단어로 정의해 본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예상했겠지만 내가 아는 한, 가장 탁월한 답은 바로 '태도'와 '형식'이다. 이 답에 대한 크레딧은 현대미술의 한 기념비적인 사건에게 있다. 스위스 베른에서 1969년 열렸던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현대 전시 기획의 서막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전시만의 특이점은 대체 뭐길래.


  본 전시의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은 이 전시를 통해 예술의, 특히 ‘예술 기획’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이전까진 예술을 향유하는 대중들은 물론, 생산하는 예술가들 역시 예술이 가진 물리적 속성과 형태를 포괄하는 '형식'이 중시되었다. 회화건 조각이건 건축이건, 모든 예술을 경험하는 근거는 그 물성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물성의 완성도가 곧 예술의 가치로 이어지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의 아이코닉한 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남성 소변기를 뒤집은 물건을 '샘'이라 부르고(마르셀 뒤샹), 눈앞에 버젓이 그려진 파이프를 두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말하는(르네 마그리트) 작품들. 이때부터 예술은 사람들이 지각하는 형식 너머를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형식은 예술가의 메시지, 즉 '태도'를 옮기는 하나의 매개체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전시의 출품작 중 하나였던 Michael Heizer의 'Bern Depression'이다. 전시장 밖 보도를 깨는 이 작품의 화법과 전시 제목을 나란히 놓고 한번 생각해 보시길.


  제만은 큐레이터로서 이런 현대미술의 흐름에 발맞춰, 전시 역시 현대미술의 양상을 오롯이 보여주는 하나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전시라면 응당 갖춰야 할 미적 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메시지(태도가 형식이 된다)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작가들을 모아 파격적인 기획을 선보였다. 이로써 그는 현대미술의 '태도'에 방점을 찍으며, 앞으로의 예술은 형식에 앞서 태도로서 존재한다는 인식적 전환을 오피셜 하게 만들었다.  




  한편, 태도를 형식으로 옮긴 현대미술의 발상으로부터 브랜드를 이해해 본다면 어떨까. 브랜드라는 고도화된 창작의 산물 역시, 태도가 형식에 앞선다고 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브랜드는 그 반대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예술이 관객의 향유를 전제로 탄생한다면, 브랜드는 소비자의 구매를 전제로 탄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브랜드가 내세운 태도가 매력적이어서 성공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1)개성있고 힙하다, 2)일관성 있다, 3)공익에 기여한다 등 하나의 노선만 제대로 타도 성공 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진다. 그러나 그 어떤 브랜드도 태도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없다. 설령 언급한 세 가지 노선을 모두 섭렵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만한 '파타고니아'를 떠올려 보자. 브랜딩 지식이 풍부한 이들이라면 간혹 백발이 성성한 창업주 '이본 쉬나드' 할아버지를 먼저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대다수는 특유의 설산 로고가 박힌 뽀글이 플리스나 티셔츠부터 떠올리지 않는가.


  브랜드의 핵심적인 가치(태도)에 앞서 로고, 프로덕트...'형식'부터 떠올리는 것이다. 태도는 분명 브랜드에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브랜드는 세상(고객)과 자신을 연결할 제품(혹은 서비스) 없이 관념만으로 존재할 순 없다. 따라서 브랜드는 형식에 태도를 담음으로써 존재한다. 그리고 어떻게 형식을 효과적으로 포장하고, 판매하느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브랜드의 성패를 가른다.


  그리하여, 요즘 방귀 좀 뀐다는 브랜드들은 앞다퉈 팝업 스토어(브랜드 공간)로 눈을 돌린다. 팝업은 브랜드의 형식(제품, 서비스)을 홍보하는 건 물론, 어떤 태도(가치, 메시지)를 갖고 있는지 고객들이 종합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는, 브랜딩의 정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간만 매력적으로 만들어 두면, 광고 없이도 방문객들이 알아서 SNS상에서 브랜드의 앰버서더가 되어 바이럴 마케팅에 앞장서 주니,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팝업에 투자하는 추세다.


  나 또한 주말이면, 브랜드 케이스 스터디를 빙자한 데이트를 위해 새로운 팝업을 챙겨 보지만, 최근 과열된 팝업 시장의 양상은 볼거리 중심으로 그치는 경향이 짙다. 팝업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이목을 끌기 위한 무리수로, 브랜드만의 고유한 태도는 도통 알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형식만 화려하게 치장한 팝업은 이제 식상할뿐더러, 경우에 따라 브랜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남기기까지 한다. 그래서 팝업을 설계하는 브랜드만의 전략이 점점 고도화되고 있는 요즘, 전혀 다른 맥락에서 근래 흥미롭게 지켜본 두 사례를 가져와 봤다.


인스타그래머블의 끝판왕, '탬버린즈 성수'


  팝업의 성지 성수동에서 조차 단연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면, 2023년 11월 오픈한 '탬버린즈 성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3층 높이의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이 건물은 1층과 지하 공간만 운영 중이며, 2-3층은 골격만 남겨둔 채 비워뒀다. 이 비싼 땅에 무슨 짓인가. 기획자의 관점에선, 탬버린즈가 작정하고 '뜨거운 감자'가 되기를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을 올렸으면 한 평이라도 더 알뜰히 쓸 생각은커녕, 휑하게 비워두는 전략은 마치 팝업에 여러 요소를 잔뜩 채워둔 채, 뭐라도 하나 더 소개하기 바쁜 브랜드들을 비웃는 듯 보인다. 채움의 끝에서 비움을 봤다는 듯, 이 플래그십 스토어는 (*엄밀히 말해, 상설 공간이니 팝업은 아님) 효율적인 공간 설계보단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설계에 집중했다.  


(좌) 2-3층을 텅 비운 임팩트 있는 건물 외관 / (우) 1층에서 내려다본 지하의 본 전시장


  그런데, 이런 탬버린즈의 선택을 정말 초연한 '비움의 미학'으로 해석할만할까.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진 않을지. 이들의 여백은 욕망으로 가득해 보인다. 건물의 외관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카메라 어플을 자연스레 켜게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지 않나. 텅 빈 브루탈리즘 양식의 건축은 이를 배경 삼아 한껏 스타일에 힘을 주고 온 '나'(방문객)가 한층 더 돋보이도록 만드는 전략에 다름 아니다.   


  텅 빈 건물 외관 앞에서 사진을 한방 남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또 한 번 텅 빈 1층과 마주하게 된다. '1층 마저 비워두다니 대체 뭔 배짱이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방문객의 시선은 지하에 자리한 전시 공간과 그 위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도록 구성되어 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한눈에 밑에서 무엇이 펼쳐질지 압축적으로 조감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제품을 체험하고, 수다를 떨며 사진을 찍고 있는 방문객들의 열기 역시 가늠하게 한다.


  이는 사람들의 욕망을 한 데 끌어모으는 브랜드의 형식과 태도(프로덕트, 서비스, 감각 등)를 촌스럽게 말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시선으로 한방에 설명한다. 이곳에 방문한 이들은 모종의 위압적인 시선을 통해 일시적인 권능을 부여받음으로써, 여타 브랜드에선 느낄 수 없었던 차별화된 관람 경험을 누리게 된다.


   건물 하나에 좀 과한 의미부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사람들은 이곳에서 불티나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다. 브랜드가 설계한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며. 그리고 SNS에 열심히 올린다. 여기서 찍은 사진정도면 평범한 듯 비범하게 내 일상을 포장하기엔 나쁘지 않기에. 요컨대 탬버린즈 성수는 남들에게 기어코 자랑하고 싶을 만한 인스타그래머블한 요소를 집요하게 담아내며, 여느 브랜드의 공간과 견주어도 핫함에 있어 우위를 뺏기지 않을, 탬버린즈만의 요새가 되었다.


창의노동자들의 깊이 있는 놀이터, '데스커라운지 홍대'


  한편, 2024년 2월 모습을 드러낸 '데스커라운지 홍대'는 광범위한 대중을 타깃으로 삼는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가치 있게 일하는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되겠다는 방향 아래 구축된 이 공간은 창의노동자들을 위한 전시장 겸, 공유 오피스이자, 맞춤형 커뮤니티다.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공간인 만큼 내부 동선과 공간 경험이 산만할 거란 우려를 뒤로하고, 실제론 무척 사용자 친화적으로 섬세하게 설계되어 있다. 일단 입장 후 받게 되는 안내를 비롯해, 내부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련의 여정은 개인화되어 있다. 모든 참여자들이 동일한 경험을 복붙 하듯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호흡으로 실행해 볼 수 있도록 짜여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좌) 실제 업무를 볼 수 있는 개방감 넓은 데스크 공간 / (우) 일에 대한 영감을 자극하는 사이드 전시


  그러다 보니, 이 공간 안에서 수동적인 머무름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곳에 있는 한, 나는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생각하고 쓰게 된다. '일은 무엇인가'하는 원론적인 물음에서 출발해, 최근 일에서 겪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에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지 등 온갖 질문에 자신을 빠뜨리게 된다. 이는 일에 관한 중요하고도 당연한 고민들이지만, 막상 일에 치여있는 동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것들이다.


  게다가 그 고민에 대한 답만 혼자 끙끙 찾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공간의 매력은 증폭된다. 이른바 '느슨한 연대'라는 이름 하에 참여자들끼리 만나는 커뮤니티성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이렇게 모인 이들끼리 초면에 일에 대한 고민을 주저리주저리 나누는 게 어색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다. 그치만 바꿔 생각해 보면, 하나의 공통주제 아래 오히려 낯선 이들이라서 더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얘기들이 오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기획은 공간의 오너쉽을 가지고 있는 데스커의 입장에서 중장기적으로 브랜드의 이미지에 무척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예상된다. 모든 공간적 경험이 벌어지는 물적 토대(형식)가 바로 데스커의 제품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일'에 대해 찐하게 고민하다가 돌아간 이들은 앞으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고민을 은연중에 데스커와 연결 지어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회사에도, 집에도 데스커의 가구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기 마련일 테다.


  게다가, 창의노동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진정성 있게 탐색해 온 트루스의 윤소정 대표, 마케터들의 마케터로 알려진 배달의 민족 출신 숭(이승희)님과의 콜라보는 데스커의 철학(태도)에 깊이를 배가 시킨다. 이는 단순히 가구 만드는 회사를 넘어 데스커가 창의노동자들의 라이프스타일에 깊이 관여하는 브랜드라는 가치를 덧입는 결과로 이어진다.




  '탬버린즈 성수'가 바이럴 마케팅에 태워질 이미지를 끝없이 재생산하는 공장에 가깝다면, '데스커라운지 홍대'는 공간에 새겨진 노동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 위에서 실제 노동이 펼쳐지는 학교에 가깝달까. 둘 중 어느 케이스를 더 높이 평가한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관객들의 니즈가 더욱 좁고 뾰족해지는 만큼, 인스타그래머블에 지나치게 경도된 접근에는 한계가 있으리라 조심스레 덧붙여 본다.   



남는 건 콘텐츠의 눈빛뿐


  형식과 태도...여러 사례를 끌어와 가타부타 분석을 늘어놨지만, 여기까지 읽으며 무엇이 기억에 남는가. 혹은 앞으로 무엇이 남을 것 같은가. 만약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면...너무 슬프지만 부족한 글을 만난 탓이니 괘념치 않아도 된다..! 나 역시 매일 아침,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홀로 외로운 줄다리기를 벌인다.


  최근 3개월 간의 아침 루틴을 공유해 본다. 일단, 기지개부터 켠 뒤 따뜻한 물 한잔 마시기. 그렇게 몸이 좀 풀리면 머리를 풀러 간다. 밤사이 굳은 머리를 기름칠하는 최선은 역시 '읽는 것'. 내돈내산 구독 플랫폼의 아티클은 꼼꼼히 정독하고, 국내외 이슈 파악 차원에서 주요 언론의 헤드라인 기사는 제목 위주로 가볍게 훑는다. 그렇게만 해도 얼추 2시간이 훌쩍. 읽고 쓰다 보면, 어느새 머리가 후끈해진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반복하는 생각이 있다.


  '와... 읽고 볼 게 끝이 없구나.'


(좌측부터) '롱블랙', '북저널리즘', '이피나인', '폴인'. 이 플랫폼의 아티클만큼은 꼭 읽고 하루를 시작하는 편. 이외에도 강추하는 미디어가 있다면 댓글로 공유 부탁드린다.


  세상에 마땅히 소개되어야 할 사건도, 사람도, 어찌나 이리 많은지. 심지어 각 플랫폼 별 전문 에디터들마다 내놓는 인터뷰, 취재기사, 논평 등을 살펴보면 은근히 동어반복도 별로 없다. 동일한 주제나 인물에 관해 논하더라도, 제시되는 관점과 사례가 다르다 보니, 저마다 읽을거리의 경쟁력이 있다.


  좋은 콘텐츠가 산더미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나쁜 콘텐츠도, 정체불명 이상한 콘텐츠도, 산재해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사이에 끼인 채, 하루하루 숨 가쁜 우리는 저 많은 것들을 본 뒤 무엇을 기억할까. 분명한 건, 그것들이 취하는 구체적인 형식과 태도는 3일만 지나도 8할은 잊힌다. 심지어 까먹지 않으려고 메모해 둔 내용조차도 일주일쯤 지나 다시 보면 생경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고도 쉬이 잊히지 않는 콘텐츠들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앞서 얘기한 멍을 때리며 떠올릴만한 것들, 그러니까 우리 무의식 깊이 침잠한 인상적인 것들을 곰곰이 떠올려 본다. 이런 콘텐츠들은 인격체처럼 다가오지 않는가. 창작자와 물아일체가 된 채, 창작자가 간직한 기발한 발상과 순수한 열의를 고스란히 담은 채 특유의 눈빛을 보내온다. 그렇게 마주친 눈빛은 우리 기억으로부터 잊히기 힘든 영역 저편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한 번 저 멀리 넘어간 것들은 세월이 흘러 그 기본적인 형식과 태도조차 희미해지더라도, 또렷했던 안광 하나로 뇌리에 두고두고 남는다.  




  눈빛의 힘. 개인적으로 사람을 중심에 둔 인터뷰 기사나 영상을 좋아하고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비유를 떠올린 건진 모르겠지만, 결국 좋은 사람도 콘텐츠도, 남는 건 일순간 섬광처럼 반짝이던 그만의 눈빛이란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나를 거쳐간 시간들을 돌이켜 볼수록, 내가 진정 수용하고 소화하고 있었던 건 일련의 형식과 태도 그 너머에 맺혀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 새로운 것들이 끝도 없이 생멸하는 콘텐츠 판에서, 더 오래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지속가능한 자신만의 창의노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선, 전심을 다해 내 안광에 집중하는 수밖에. 강렬한 안광이란 게 의식한다고 불쑥 생기는 것도, 훈련을 거쳐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풀리지 않을 원대한 숙제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이에 도달할 지름길은커녕 마땅한 지도조차 없지만,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히 시대의 파도 위를 즐기며 타다 보면, 혜안을 담은 안광이 만개하는 날이 언젠간 오지 않겠나. 다소 낙관적인 전망에 기대 본다.


  안광을 둘러싼 머릿속의 생각들을 막상 글로 옮겨 놓고 보니, 추상적이다 못해 사뭇 종교적이란 생각마저 들기도 해서 머쓱하다.(네 무교입니다만...) 그럼에도 몇 주째 이 발상이 기획자로서 나를 강하게 사로잡고 있음을 방관할 수만은 없단 생각에, 아직 영글지 못한 단상들을 글로 옮겨 보았다.


  아직은 나이브하게 규정하는데 그친 안광에 대한 상념들은 과연 몇 달 혹은 몇 년 뒤 내게 어떤 의미로 번져가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나는 안광으로부터 콘텐츠의 미래를, 창의노동자들의 미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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