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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라떼 May 10. 2019

5. 바벨론 포로와 새 출애굽 (3)

'고난의 종' 사상

  이사야 후반부에는 바벨론 포로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소망들이 힘있고 장엄한 문체로 펼쳐집니다. 그것은 제국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세상 가운데서도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며, 그분께서 그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고레스 왕을 움직이셔서 유다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실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포로 이전부터 하나님을 가까이 해 본 적 없는 많은 백성들에게 이것은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하나의 모델을 통해 예언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것은 바로 '고난의 종'이라는 사상입니다.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


 이사야 후반부는 여러 곳에서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이사야 42:1~4; 49:1~6; 50:4~9; 52:13~53:12). 학자들은 이 부분을 오래도록 연구해 왔고, 세부적인 의미에 관해서는 여전히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기도 합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던 구약의 대표적 구절들이기 때문이지요. 조금 길지만 종의 노래를 대표하는 53장 본문을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1~6, 개역개정)


 '고난당하는 종'은 이사야의 사상 중에서도 매우 독특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아모스, 호세아,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은 모두 그 예언의 기반이 율법(모세오경, 그 중에서도 신명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의 '고난당하는 종'은 어디서도 그 원류를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입니다. 고대 동방의 어느 문헌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우리는 선지자가 전적인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 신비를 들여다 본 것으로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을 표합니다.  


 이사야는 지금까지 여호와의 주권,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노래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종'은 그가 예언한 소망이 "어떻게(How)"이루어질 것인가를 하나의 모델로 제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승리와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는 결정적 인물, 즉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함으로써 성취될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종'이 맞이할 운명은 정복과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그는 조용한 수고와 무한한 인내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사야 42:1~2, 공동번역)


 그는 수많은 치욕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할 것입니다.


 주 야훼께서 나의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아니하고 꽁무니를 빼지도 아니한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 나는 욕설과 침뱉음을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는다. (이사야 50:5~6, 공동번역)


 또한 그 종은 자신을 죽음에 내어놓았을 때만 하나님의 승리를 이루어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종이 희생을 당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 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 야훼께서 그를 때리고 찌르신 것은 뜻이 있어 하신 일이었다. 그 뜻을 따라 그는 자기의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오래 살리라. 그의 손에서 야훼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이사야 53:2~10)





고난의 종은 누구인가?


 그러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고난의 종은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가?"

 네,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참된 의미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노래가 모두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성급하게 '그가 예수다'라고 결론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의 의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받는 종은 -성경에 묘사된 그대로- 특정한 "개인"을 가리킨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상적인 인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자, 다시 한 번 출애굽을 이루어 낼 '새로운 모세'.

 반면 고난의 종은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미래가 '여호와의 선택받은 종'이라는 하나의 인물로 상징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이스라엘 안에 있는 '의로운 자', 즉 '남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이사야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종이 개인을 가리키든 공동체를 가리키든, 이사야의 노래가 당시 백성들에게 강하게 전달한 내용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진 운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이할 운명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공동체를 상징한다면 더 말할 것이 없고,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의로운 백성들도 그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입니다. 고난의 종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 승리와 나라를 얻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그와 같이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고난을 통해 여호와의 영광을 세상에 선포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역시 정복과 싸움이 아닌 스스로를 내어주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충성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은 고난의 종을 따르고 고난의 종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종의 사명을 함께 지는 자들입니다.

  

 이사야의 '종의 노래'는 포로된 백성들에게 하나의 영감을 주었습니다.

 "아, 우리가 지금 수치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단순히 죄값을 치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구나!" 


 이사야도 그들의 징계는 이미 끝이 났다고 선언합니다.


예루살렘 백성에게 친절하게 말하여라. 그들의 복역 기간이 끝났고, 그들의 죄값으로 이미 지은 죄의 두 배에 해당하는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다고 일러 주어라. (이사야 40:2, 쉬운성경)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징계 이상으로 받고 있는 이 고난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깨달음이 싹틉니다. 그들이 이 상황에 처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고, 그들이 고난받는 것은 '개고생'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쓰임받는 것이었습니다. 포로들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승리가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은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완전히 재해석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지금 새로운 출발과 더 큰 운명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참된 백성들, 곧 고난의 종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있다. 그러나 고난은 더 이상 너희에게 의미없는 쓰라림으로 임하지 않고 오직 구원의 진정한 도구로서만 임할 것이다. 그리고 승리는 확실하다.”




우리에게 놓여진 사명의 길


 안타깝게도, 이사야의 '고난의 종' 사상은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유다 백성들이 다시 일어나 독립을 쟁취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수복의 희망으로 가득찬 그들에게, 도리어 '고난'을 사명으로 삼으라니?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국가와 성전'이라는 틀을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은 고난의 길을 수용함으로써만 가능함을 강조하십니다.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우리도 '고난'의 사명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길을 걷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간증들을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사람이 겪은 사망의 골짜기가 나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이 좋은 만큼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싶어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는 만큼 세상에서도 승승장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범적'이며 '이상적'인 신앙생활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고생과 고난을 다 담당하셨으니, 우리는 마치 그런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도 큰 건물과 사회적 영향력 있는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요.

 하지만 신약의 어떤 구절을 찾아보아도 성도들이 가야할 길과 사명은 분명하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어렴풋한 가운데 하나님의 영감으로 예언한 바로 그 고난의 종,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히브리서 13:13, 개역개정)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개역개정)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 1:18, 개역개정)


 우리는 예수의 대속하심으로 구속함을 받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스께서 승리를 얻으신 방법이 가이사 앞에서의 철저한 패배와 죽음이었던 것처럼,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도 바로 낮아짐과 능욕받음, 그리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계획에 동참하고 싶다면 그 길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만- 없는 고난을 억지스레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혹은, 우리 자신의 허물(범죄나 사회적 물의 등)로 겪는 고생을 감히 십자가 고난으로 미화시켜도 안됩니다.


 단언하건대,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제자의 삶을 사는 자들은 반드시 고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예기치않게 오는 환란일 수도 있고, 신앙의 핍박일 수도 있으며, 성도로서 자발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불이익일 수도 있습니다. 밀물처럼 넘실거리는 소비문화 가운데서의 절제, 세속 성공에 대한 포기, 자녀 교육에 있어서 다르게 가져가야 할 기준들.... 우리의 몫은 그것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마치 패배와 멸망처럼 보이는 그 안에 승리가 있음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6. 거룩한 국가공동체와 묵시적 왕국 (1) 에 이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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