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이렇게 돼서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냈던 것 같아... 상연이랑 있는 게 좋았으니까... 그냥 너무 아쉽고... 하... 지금도 계속 집에서 연락은 오는데... 둘이 진짜 좋아서 만난 거냐고 묻네... 계속 욕도 하고... 오늘도 집엔 못 들어갈 것 같네.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너무. 잠깐만." 그 사람이 변명을 토해내듯 말했다.
"하... 둘이 연락하고 있냐 하네... 엄마한테도 자꾸 뭘 보내는 것 같고... 이혼하자 하네... 상연아... 만약에 내가 다시 시작하자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우리 그냥 같이 살까?" 그가 얘기했다.
"우리 그럼 지금 하는 일도 그만두고 다른 일 찾아야 하고, 관련된 사람들 전부 연락 끊고 살아야 할 거예요. 같이 일했던 사람들부터, 친구, 가족, 부모님. 과장님은 애기까지. 완전히 등지고 우리 둘만 고립돼서 살아야 할 거예요. 아무한테 도움도 못 받고 살 거고, 같이 산다고 해도 우리는 결혼할 수도 없고 한다고 해도 축하받을 일도 없을 거예요. 애를 낳을 수도 없을 거예요. 과장님은 애기를 못 보더라도 괜찮은가요? 그렇게 둘이 고립돼서 살아가는 게 과장님이 원하는 건가요?" 나는 차분히 말했다.
전화기 너머 근심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그는 말했다. "어렵다."
'어렵다' 그 말을 내뱉는 건 참 쉬웠다.
"애기만 아니었음... 진작 이혼했어... 하... 나도 미치겠다. 지금 계속 연락은 오는데... 또 뭐라 하는 것 같은데...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냈지? 상연아. 한 번만...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그냥 같이 살까?" 그가 말했다.
"저희 둘이 고립돼서 사는 게 과장님이 원하는 거냐고요."
"하... 어렵다. 미안해 내가 요 며칠 잠도 잘 못 자고...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집이랑 연락은 해야 하고... 정신이 없다..."
"과장님. 과장님은 이미 일어나지 않을 질문들로 제 반응을 살피는 거 자체부터가 애초에 저랑 같이 살 생각도 저를 책임질 생각도 없던 거예요. 저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제가 당장 다시 만나자는 부탁을 거절한다 해도 제가 이 일 이후로 아예 안 보겠다 하더라도 과장님은 이혼하고 아기까지 보지 않고 제가 받아줄 때까지 기다릴 각오는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과장님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저한테 그런 말로 헤집어 놓지 마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상연아..."
"과장님은 가족한테 가는 게 맞아요."
"한 번만... 안될까?"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요? 왜 그렇게 이기적이세요?"
"미안해... 내가 너무 욕심냈다... 이 전화가 정말 마지막일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없어요."
"상연이랑 함께한 시간이 너무 좋았어.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걸... 내가 사랑한다는 말은 진짜 진심이야. 상연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상현이한테 정말 고마운 부분도 많고... 정말 마지막으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없어요."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줘."
"싫어요."
"한 번만..."
"잘 지내요. 끊을게요."
"아... 한 번만... 사랑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과장님!!!" 하고 나는 소리쳤다.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저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책임 지지도 못 할 행동을 한 건 과장님인데 왜 벌은 제가 받아야 하는 거예요? 저한테서 위자료로 가져간 돈으로 화해하시고 호의호식하면서 잘 지내겠죠. 왜 책임은 저만 받아야 하는 거예요? 왜..."
"미안해... 내가 돈은 못 내주더라도 살면서 어떻게든 갚을게..."
"다신 연락하지 마세요. 잘 지내세요."
나는 그렇게 원룸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마지막 전화를 끝냈다. 얼마 전에 청소했던 탓인지 15평짜리 원룸은 전화를 끊은 적막 속에서 더 크고 텅 빈 듯 보여 너무 휑한 나머지 덩그러니 찍혀있는 점 같았다. 관계란 얼마나 덧없고 보잘것없는지. 타인의 존재의 의미는 정작 자신의 어떤 결핍을 채워주거나 보완해 줄 수 있다는 믿음에 그에게 가치를 불어넣어 그 존재의 의미가 더 해지는듯하다. 사랑이라 착각을 일으키는 건 그러한 타자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스스로가 아닌 타인에게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정을 통해 구제될 수 있다는 스스로를 설득하는 오랜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인정 앞에 서게 됨과 동시에 나의 실체가 없음을 마주하게 됐을 때 어떤 형태의 관계든 우리를 포함해 덧없이 무너져 내린다. 내가 끌어왔던 이 관계가 끝남과 동시에 위자료를 통해 태훈이를 포함한 내가 사들인 관계를 생각했다. 아무도 모른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전히 사랑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