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하연언니에게
언니 잘 지내고 계신가요?
그날이 있은 뒤로 염치없이 저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요.
과분한 사랑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날을 보내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어요.
언니,
제가 죽을 때까지 혼자 외롭게 살다 갈 거라는 말 기억하시나요?
죄송하지만 저는 그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아요.
이제 와서 행복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겼거든요. 이기적이지만 언니가 한 번만 용서해 주실 순 없을까요?
딱 한 번, 제가 한 실수에 대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실 순 없을까요?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새벽녘 어슴푸레 눈을 떴다. 나를 안고 곤히 자고 있는 그의 어깨너머로, 창밖엔 짙푸른 하늘이 도시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치워 침실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굴러다니는 빈 와인병들을 지나쳤고, 화장실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몰랐다. 나의 인생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걸. 과거는 현존하지 않는 시점이라 치부될 뿐 모든 건 결국 한 점에서 시작해 어떤 모양으로든 이어지기 마련이라, 과거를 제외하고는 '나'라는 사람은 현존할 수 없는 주인공이기 마련이다.
화장실로 들어가자, 세면대 임신 테스트기가 놓여있었다.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리려 집어 들었다 희미한 한 줄을 발견했다.
'말도 안 돼...'
나는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화장실 밝은 불 밑에 테스트기를 갖다 대고 돌려보기 시작했지만 희미한 줄 하나는 어느 각도에서든 존재감을 드러냈다. 나는 그 자리에 테스트기를 양손에 붙잡고 한동안 서있었다. 언제 했는지, 어쩌다 하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화장실 밖에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태훈이는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그렇게 자고 있는 태훈이를 확인한 후 나는 화장실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현관으로 갔다. 태훈이가 깨지 않게 문을 조심히 닫은 후 편의점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태훈이는 여전히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확인 후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다시 한번 테스트를 하게 되었다.
침대로 돌아가 눕자 태훈이가 뒤척이며 깼다.
"자기야"
"응?" 태훈이가 말했다.
"나 생리를 안 해. 만약에 나 임신이면 어떨 것 같아?"
"내가 낳는 것도 아니고, 나는 네가 좋아서 만나는 건데. 원래 아이 생각도 없었고... 내가 말했잖아 나는 반출생주의였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그렇지만 이제 네가 행복한 게 내 삶의 이유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태훈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내게 말을 했다. 그리고는 나를 꼭 끌어안고 다시 잠이 들었다. 반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이 가상현실이고 이것조차 포함된 현실이라면 태훈이가 나라는 사람을 선택했을 때의 인생과 선택하지 않았을 때의 삶 두 가지로 나뉘게 될 것이고, 선택받아 행복할 내가 있을 것이며 동시에 선택받지 못해 불행 간 내가 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네가 행복한 게 내 삶의 이유니까.'
이 한마디가 진심이길 바랐다. 그가 뱉은 말속에 다른 모든 가능성을 제기하는 감정들을 제외시키고 그가 가진 순수한 감정만 각인시켜 그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붙잡아 두게 하고 싶었다. 최선의 삶이란 태훈이에게 있어 나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잠깐에 나의 부재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큰 불행으로 다가와 빈자리를 채우는 시간들이 의미 없고 한없이 무료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구멍처럼 자유가 느껴졌고 같은 공포감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구속을 원하길 바랐다. 그리하여 어떤 가상현실에서도 결국 어느 시점에서 선택받아 행복할 내가 존재할 수 있도록. 더 이상 혼자인 내가 존재할 수 없도록. 그렇지만 그 일을 말하게 된다면 태훈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태훈이는 나를 용서하고 받아줄 수 있을까?
그날 오후 나는 테스기가 오작동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태훈이에게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병원을 방문했다.
"여기 동그란 거 보이시죠?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게 아기집인 것 같은데 주기가 정확하진 않다고 하시니 늦게 배란한 걸 고려하면 임신이 맞을 것 같네요. 그래도 정확하게 아기집을 봐야 하니 혈액검사하고 다음 주 중으로 다시 내원해주셔야 할 것 같네요." 의사가 말했다.
의사가 모니터로 열어둔 초음파 사진 위로 두 눈은 갈 곳을 잃었다. "아... 네."
"아빠는 어디 가고 혼자 왔어요?" 의사가 말했다. '아빠'라니, 태훈이가.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요. 예약 잡고 다음 주에 봐요." 의사가 말했다.
병원 밖을 나왔을 때 쥐고 있던 초음파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기집으로 추정된다니. 아무리 봐도 초음파 속 세포덩어리가 덩그러니 자리 잡아있는 게 무감각하게만 느껴졌다. 아직 그 일이 있은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임신이라니.
1년 전 그날 밤 창 밖엔 굵은 빗방울이 들이치고 있었고, 그 사람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