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작은 없다!
까혼(Cajon)이라는 악기가 있다. 사각의 나무상자로 된 타악기인데 가벼운 규모의 어쿠스틱 밴드에서 주로 사용되곤 한다. 나는 이 타악기를 2008년경 접하고 난 뒤부터 버스킹 팀이나 어쿠스틱 밴드에서 퍼커션 포지션을 맡을 때에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포지션 자체가 풀 밴드(Full band)에서의 드럼 포지션이다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곤 한다.
"까혼 소리가 참 신기하네요, 기타랑 잘 어울리고... 그럼 드럼도 치시나요?"
"아... 아니요, 드럼은 안 쳐봤고 그냥 까혼이랑 퍼커션만 합니다... "
내가 까혼을 처음 접한 2008년경에는 까혼은 국내에서는 생소한 악기였고, 어디서 강습은커녕 심지어 구매조차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 동영상들을 보며 홀로 독학으로 익혀 나가게 되었고, 근본 없는 자기만의 연주방식이 몸에 배어들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노는 물이 본격적인 음악 씬(SCENE) 도 아니고 지방 기타 동아리나 거리 버스킹이 주 무대였으니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이 어찌어찌 꾸려오곤 했었다.
그것 만으로도 무슨 큰 문제가 있었으랴만 저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내 안의 소심한 어느 부분은 항상 움찔거리며 자격지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니, 드럼 포지션의 악기를 하면서 드럼도 모르고 친단 말이야? 그럴 수가 있나?라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처럼.
물어보는 사람이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물어봤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대부분은 사실 그렇다...) 드럼을 칠 줄 아는 게 퍼커션을 치기 위한 필수 요소도 아니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제풀에 놀라 움츠리기에 바빴다.
아니, 그럼 드럼 배우면 되지 무슨 문제야.라고 하기에는 내겐 시작하지 않을 핑곗거리가 너무나 차고 넘쳤다. 까혼을 직접 배우는 것도 아니고 드럼을 배워서 그 성과를 까혼에 접목시킨다는 것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드럼을 시작하게 되면 석 달은 타이어만 친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스틱 연습을 하고, 기술을 익히고 최소한 연(年) 단위로 노력을 기울인 다음 다시 스틱을 버리고 손으로 치는 까혼에 그 주법들을 연계시킨다는 것은 그 당시의 나한테는 너무나 먼 길을 돌아가는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밴드에서도 어쿠스틱 밴드라는 특성상 드럼을 사용할 일이 없었으니 더욱 직접적인 필요성을 느끼기 힘들었다. 심지어 40대의 나이에 새 악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어느 하나 똑바로 잘하지도 못하면서 여러 악기들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에겐 너무 늦은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그럴 시간에 기타나 더 연습해, 아직 하고 싶은 하모니카 곡 들도 많이 밀렸잖아?
하지만 본질은 그보다는 조금 더 단순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잰 체할 수 있으려면 바닥부터 시작하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들어간다는 것. 그 필연적인 시간을 투자하고 새로운 묘목을 키워나가느니 지금 설익어 있는 과실들을 만지작거리는 게 더 짜릿하니까.
그러던 어느 날 샘플링패드라는 전자드럼 비슷한 악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전자악기와 앰프 등으로 유명한 로랜드(Roland) 사에서 나온 악기인데 고무로 된 패드를 치면 미리 저장해 둔 가상악기의 데이터가 드럼부터 봉고, 콩가, 탬버린 소리 등을 재현해 주는 악기였다. 밴드에서의 퍼커션의 사운드 한계에 답답해하던 나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고, 얼마간의 중고사이트 잠복을 거쳐 새 악기, 아니 중고 악기를 손에 쥐게 되었다. 전자드럼패드이니 만치 당연하게도 드럼스틱으로 연주하는 악기였지만, 10여 넌 넘게 밴드에서 리듬 사운드를 맡아왔으니 어차피 본질은 같지 않겠어?라고 호기롭게 악기를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새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뚱땅거리며 악기를 주물러대다가 드디어 밴드 합주날 의기양양하게 샘플링패드를 들고 합주실로 갔다, 코찔찔이 시절 새 변신로봇 필통을 들고 학교로 가던 어느 날처럼 이 새로운 문물(?)을 모든 팀원들이 나처럼 신기해하고 환호해 주길 바라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의 합주는 망했다. 합주 내내 기타를 치던 J군의 떨떠름한 표정은 나의 자존감을 깎아먹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건반 주자의 움찔거리는 손가락은 차라리 말로 하는 질책보다 더 아프게 내 귀에 꽂혔다. 밴드의 최연장자라는 포지션이 험한 막말을 막아줬겠지만 당연하게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흠... 형님, 음.. 아무래도.... 악기를 바꾸실 거면 좀 더 연습을 많이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요?"
J군의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멘트에 잔뜩 들떴던 내 고양감은 찬물 한 바가지를 덮어쓴 듯 식었고, 갑자기 현실이 성큼 내 곁에 다가왔다. 퍼커션으로 원곡의 드럼 사운드를 대체할 때까지는 퍼커션에게 아무도 드럼의 퀄리티를 요구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드럼의 소리를 내는 악기인 이상 필연적으로 제대로 된 드럼 사운드와 비교당할 수밖에 없는 법. 현실은 드럼의 기본기 하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마구 쳐 대는 난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고, 악기가 좋으면 뭐 하나, 손이 저렴한 것을......
그 난리를 치고 바로 깨달은 바가 있어 재깍 드럼학원이라도 갔으면 다행이겠지만 오래된 타성은 어디 가지 않아 쉬이 결심도 못하고, 그렇다고 깔끔하게 포기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시간만을 보내고 있었다. 중고라고는 하지만 샘플링패드는 취미에 투자하기엔 제법 고가였고, 투자한 보람은 뽑아내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런 애물단지가 없었다. 확 팔아버려? 아니야...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걸... 그래도 지출이 너무 많은데... 자꾸 악기만 질러대는 통에 쌓여있는 악기류들만 보면 덩달아 심란해졌다.
악기류들은 취미용품들 중에는 꽤나 돈이 많이 드는 물품이고, 일일이 사용해 보고 구입하지 못하기에 중고 거래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 품목이기도 하다. 모든 악기를 가질 순 없으니 항상 구매하고, 사용해 보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중고로 방출하는 수순을 밟는다. 그동안 지출도 많았고 하니 조금 정리할 만한 물건들을 찾아 몇 가지 물건들을 중고사이트에 올렸다. 그중에는 퍼커션과 함께 사용하기 위해 사놓았던 저가형 심벌들도 몇 장 있었다. 매번 그렇듯이 저렴한 가격에 혹해서 구입하고, 소리에 실망하고 또 다른 심벌을 구입하는 참 바보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루틴의 산물들이었다. 그렇게 쌓인 심벌 석 장 정도를 당근마켓에 올리고 얼마 후, DM(다이렉트 메시지)이 날아왔다. 심벌을 구매하고 싶다는 내용과 함께 본인이 오늘 경비 일을 늦게 마치기에 내일 오전 만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다음날 오전 약속장소로 심벌을 들고나갔다.
약속장소에 나오신 분은 타이트한 자전거슈트 복장에 킥보드를 타고 오신 70대 정도로 보이는 어르신이셨다. 드럼물품을 사러 오신 분 치고는 나이가 꽤나 많아 보이시는 그분은 내가 가지고 온 심벌을 꼼꼼히 보시면서 몇 가지를 물어보셨고, 물어보시는 내용을 보아하니 초보이신 듯했다.
최근에 문화센터에서 드럼 강습을 받기 시작하셨고, 중고 거래 등을 통해서 하나씩 드럼 부품을 구입해서 집에 드럼을 세팅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했다. 기초생활 수급자에 야간 경비 일을 하고 계신다는 어르신은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석 장에 7만 원) 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생각대로 두 장만 구매하실 건지 석장을 다 구매하실 건지 망설이시는 모습이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이내 흔쾌히 구매를 결정하셨다. 밥 한 끼 덜 먹어도 하고 싶은 취미를 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냐고 하시면서 수줍게 웃어 보이셨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지금 시작해서 죽기 전에 다 배울 수나 있겠나 싶다고 말하시면서도 70이 넘은 나이에 지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계신 모습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 오던 내 모습이 대비되었다. 조심스레 에누리를 말씀하시는 어르신에게 결국 두 장 값으로 석 장을 드리고 나는 진심 어린 응원을 해 드렸다. 정말 멋있으십니다, 형님!
이제 나는 드럼학원 6개월 차다. 비록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된 음악에 맞춰 드럼을 쳐 보지 못하고 반복된 메트로놈 박자의 홍수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50대 새내기지만 뭐 어떠랴, 세상에는 달성할 목표보다 걸어가는 길 그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이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