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먼 미래의 제 모습을 그려보곤 합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긴, 그렇지만 세월이 묻어나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어느 할머니를 떠올립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보금자리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이 할머니는 젊은 시절 넉넉히 벌어놓은 돈 덕분에 주변에 손 벌리지 않고 살아갑니다. 한껏 베풀 줄 아는 마음씨로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는 그런 할머니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대신 마음속에 한 가지 물음이 떠오릅니다. 과연 할머니가 될 수나 있을까?
더 많은 돈을 모으고, 더 멋지고 뛰어난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은 매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게 하는 촉매제였습니다. 다만, 그 노력의 과정에서 건강을 뒷전으로 미뤄둔 것이 문제였습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무엇 때문에 제가 이 병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후회되는 지난날들이 자꾸 제 머릿속을 스칩니다. 혹시 밤새 과제를 하겠다며 마셔댔던 커피의 영향인가, 끼니를 거르고 매번 야식으로 대충 때운 탓이려나, 바쁘다는 핑계로 운동을 등한시하지 말 걸,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들였어야 했는데. 이러한 행동들이 지금 앓는 병의 원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행동들로 인해 병에 걸렸을 테고, 지금과 같은 후회를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고작 작은 병 하나 있을 뿐인데, 제 일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배변 신호로 인해 외출이 조심스럽습니다. 어딜 가든 화장실을 먼저 찾아둡니다. 약이 떨어지면 만사를 제쳐두고 약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합니다. 매일 조심스럽게 식사를 해야 하고, 식단과 건강 상태도 매번 기록해야 합니다. 대중교통을 오래 타고 이동하는 것도 두렵습니다. 앞으로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이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 증상에 더해 무력감, 피로감, 영양 부족, 빈혈 등의 증세를 겪으시는 분들의 고통은 더 큽니다. 고작 작은 병 하나 있을 뿐인데, 제 일상은 이렇게나 많이 달라졌습니다.
난치병을 완장 삼아 으스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명을 단축하는 심각한 질환은 아니니까요. 단지 일상생활이 좀 불편할 뿐입니다. 제 이야기가 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계신 분들께 오히려 불쾌한 인상을 드리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글을 씁니다.
아프다는 건 일상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이 사라지는 공포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이러스가 일상을 앗아가 버린 지 벌써 2년 째니까요. 그렇기에 소리 없이 찾아오는 질병에 더욱더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범하게 일상을 누리기 위해서요. 어리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저처럼 젊음에 기대 건강을 낭비하는 또래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한 것들이 지구를 망치듯이, 인간의 편리함을 위한 것들이 사람도 망칩니다. 편리하게 잠을 쫓을 수 있는 카페인 음료를 마시고, 새벽 2시에도 멀뚱멀뚱한 눈으로 유튜브에서 '먹방’을 찾아보다가 그 자리에서 미각을 강타하는 자극적인 음식을 편리하게 시켜 먹을 수 있는 시대. 편리는 소중하고도 유한한 우리의 삶을 조금씩 갉아 먹습니다. 이러한 편리의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경고하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편리함을 버리라고요.
이 글을 쓴 또 다른 이유엔 염증성 장 질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도 있습니다. 염증성 장 질환을 이겨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조기 진단과 빠른 치료이기 때문입니다. 금기시하는 똥 이야기를 거침없이 해보려던 시도 역시 이러한 맥락입니다. 세상은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항문 질환 또는 대장 질환은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니까요.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똥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로 말미암아 우리가 똥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관대해진다면 그보다 감사한 일이 없겠습니다.
똥이 보내는 경고는 질병의 신호탄과 같습니다. 당신의 똥을 잘 살펴보세요. 색깔, 냄새, 무른 정도, 배변 주기 등 똥이 보내는 신호에 주목해보세요. 똥은 염증성 장 질환 외에도 당신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세상에는 자기 변에 관심이 없어 질병이 있는 데도 치료 시기를 놓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도 다행히 조기에 발견하였기에 빠르게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병이 심해진 후에는 손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웃기시겠지만, 저는 요즘 변기에 대고 종종 말을 걸어봅니다. 이제 좀 나아져 보자. 약을 삼킬 때면, 오늘도 대장까지 무사히 흘러가 잘 스며들어주렴, 하고 바라봅니다. 질병을 나를 괴롭히는 적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와 잠시 다툰 친구라고 생각하려 합니다. 이 친구와 다시 친해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 친구의 마음이 풀어지면, 오래오래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또 갖은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지극히 사적인 제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당신께 저도 지극히 사적인 질문 한 가지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똥은 지금 어떠한가요?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