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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Aug 18. 2022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12일 차, 20200329

마추픽추

몇 주째 방 안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는데도 매일 글을 쓸 내용이 있다는 게 신기하다.


나지막이 일어난 코로나 가득한 베를린의 일요일 아침은 어제의 봄 햇살은 장난이냐는 듯

언제나처럼 포근한 잿빛 구름으로 가득한 듯하다.

사실 내 방에서는 하늘이 정확히 보이지 않아 모른다.


유리(새로 들어온 룸메이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오늘은 하와인안 팬티를 입어서 더욱이나 페루 사람 느낌이 물씬 풍긴다는 느낌을 받는 나는

역시나 조선 고지식인이다. 혹은 고조선 지식인.


유리 왈: Air B&B에서 지금 이 방으로 이사를 한 이유는 다분히 도시 등록 때문인데 요즘 관공서들이 다 닫아서 신청을 못하네~ 젠장~

나 왈: 오 이런! 정말로 안됐구나. 이런 시기에 굳이 이런 좁아터진 방에 오지 않았어도 됐었을 텐데!

유리 왈: 그래도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고 있어. 힘내자꾸나!

나 왈: 왈왈왈왈왈!!!!!!


유리는 이름은 유리지만 멘탈은 유리가 아니다.

그는 이사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기분 나쁜 기색이나 우울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알렉시스 산체스를 닮은 피부색에 조금은 두껍지만 오뚝 솟은 코,

짙고 깊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눈이 어우러진 인상을 통해 바라보는 그의 과거는

양복을 입고 페루의 도심 속을 거느리며

고층 건물의 사무실에서 바쁘게 회의를 하고 업무를 보다가 자유와 더 큰 기회를 갈망하며

창문 너머의 마추픽추를 바라본다.

긍지 높은 우리 조상들과 같이 나의 거대한 야망을 실현시키러 저 큰 세상으로 나가겠어! 가자 영국으로!

하고 영국에서의 공학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이곳 베를린으로 왔다.


교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종종 맞대는 얼굴이 있어 다행이다.

나 같으면 온갖 불만의 이유를 다 만들어서 현재 상황에 아쉬워하고 침울해할 텐데

유리의 꿋꿋한 모습이 곁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나도 그의 눈에서 마추픽추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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