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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3. 2024

한 가지 작은 바람, 평평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다는 것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33일 차, 20200419

새로이 이사한 방에서 보내는 첫 일요일. 뭐 사실 지난 하루하루가 이사 후 첫 요일이긴 했다. 


아직 이불보가 씌어지지 않은 이불. 한가운데가 마리아나 해구 급으로 들어간 침대 매트리스. 껍데기가 벗겨져 가는 인조가죽 사장님 쿠션 바퀴 의자.

영롱한 에메랄드 색 탁상은 바닥에 앉으면 너무 높고 의자에 앉으면 너무 낮다. 그리고 독일에선 굉장한 레어템인 자개무늬 옷장. 

내 방의 가구들을 간략하게 열거해 보았다. 사실 묘사하지 못하는 가구가 하나 있는데, 한국 이삿짐 상자를 오려서 만든 듯 한 서랍장이다. 

아마도 전에 이 방에 살던 분 중 하나가 욱 하는 성질에 더 이상 이사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득 담아 본인의 기질을 발휘해 이삿짐 상자를 오려서 헌정한 가구가 이날까 싶다. 

하나하나만 봐도 병맛인 가구들이 한데 모여 있으니 참으로 핵 병맛이다. 


내 특기인 장점 분석하기를 발휘해서 이 집의 장점을 하나하나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방 문이 기묘하게 기울어져서 그냥 닫으면 닫히지 않고 마지막에 살짝 들어서 닫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바닥이 평평하지 않은 까닥인 듯하다. 사뿐하게 밟아보아도 발바닥 면적 한 끝과 다른 끝의 높이 차이가 느껴지는 바닥. 때문에 모든 가구들은 조금씩 흔들흔들 거린다. 창을 열면 인도가 바로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정도만 보일 정도의 높이에 창문이 닿아 있는데, 창문을 열고 있으면 내 방이 저 인도 끝까지 이어지는 개방감을 준다. 


복도로 가면 갤러리식 조명이 있는데 조명 색을 누가 골랐는지 주인집 아줌마의 시래기 빛 외투가 생각난다. 사실 이 조명은 정말 무엇이 보이지 않을 때만 키고 밤에도 잘 키질 않는다.


화장실에는 두 개의 전등 스위치가 있다. 하나의 스위치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전구가 없다. 전기를 아끼고자 하는 독일인의 감성을 따라한 것일까. 다른 하나의 스위치는 메이드 인 저머니를 뽐내는 고품질 흰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화장실용 찬장 위에 달린 조명과 연결된다. 툭하면 부서질 거 같지만 메이드 인 저머니의 내구성을 믿고 조심히 다루고 있다. 그 밑에 위치한 세면대에는 항상 찬 물만 나오는 수도꼭지가 연결되어 있다. 최근 알 수 없는 이유로 치아가 시리는데 상쾌한 찬 물 덕분에 이를 헹굴 때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매번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극기의 훈련을 한다. 세면대 옆에는 창문이 하나 나있는데 건물 뒷 쪽의 주차장과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 정도가 위치한 높이에 달려있는데 노출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고의 창문이 아닐까 한다. 보통 독일 창들은 위에만 살짝 열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는데 본 창은 미니멀하게 앞 뒤로 열리는 기능만 선사한다. 


복도를 지나면 부엌이 나온다. 부엌은 온통 회색 빛이 가득한데 조명을 켜도 모두가 흡수되어 참으로 요리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수납장의 손잡이에는 친절하게도 누군가가 손잡이를 잡을 때 미끄러지지 말라고 온통 끈적끈적한 무언 가를 미리 칠해놓으셨다.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고 항상 제대로 손잡이를 잡고 열 수 있는데 지나친 한국인의 배려가 여기서도 보인다. 보통 주방에는 최소한 존재하는 쓰레기통은 환경보호차 빠져있다. 이것은 참으로 베를리너스러운 처사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내 방에 있는 영롱한 에메랄드빗 탁상의 붉은 빛깔 버전이 부엌에도 하나 있다. 이 애매한 높이의 탁상 옆에는 갈라져가는 인조가죽 낚시 의자 비스무리한 것이 있는데 여기서 식사를 하면 항상 낚시터에서 식사한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음에는 배경 음악으로 파도 소리라도 틀어놔야겠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껏 수그리고 식사를 하고 나면 접혀있던 위장이 펴지면서 조금만 먹어도 엄청난 포만감을 주는 그런 식탁이다. 


아무래도 내가 지내기엔 과분한 집이다.

하루하루 몸 둘 바를 몰라 긴장감에 잠을 드는지 항상 피로감에 잠을 깬다. 

내 짐은 한 구석에 몰아져서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이 공간에서 나는,

앞으로도 적응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이런 병맛이 현재의 나의 상황과 너무나도 어울리기에 웃음만 나온다.

오늘도 앞으로 살 공간을 부지런히 찾는다. 

한 가지 작은 바람은, 평평한 침대에서 잠들고 싶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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