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읽는 그림책 : 그 아이가 바로 나야!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아이들에게 '책 읽는 환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기 위해 거실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지고 있던 멀쩡한 걸 버릴 수는 없고, 또 아예 없으면 우리 부부가 유일하게 열광하는 <무한도전>은 어떻게 보나 하는 생각에 차선책으로 안방에 텔레비전을 설치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까지만 해도 이런 전략은 꽤 효과가 좋았다. 아내가 매일 밤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했지만, 거실에 텔레비전이 없다 보니 아이들도 틈나는 대로 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책으로 집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 책도 일종의 장난감이 되었고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흘러갔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일부러라도, 책장에서 책을 꺼내 아이들 옆에서 독서를 했다. 그럼 장난감을 갖고 놀던 아이들도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책을 읽었다.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에는 되도록이면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일종의 의식(ritual)처럼 그림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잠자리에 들었다. 시간은 대개 10시 전후였는데, 이르면 9시 일 때도 있었다. 아기 때부터 들인 습관이라 커서도 유효했다. 가끔 Q가 '한 권만 더'를 요구하긴 했지만, 그림책 읽기를 마치면 군말 없이 예쁘게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 줄 알았다.
아이들이 자러 들어간 후 아내가 설거지와 집안일을 마무리하는 '점방' 닫는 시간이 내 퇴근 시간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온종일 굶은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떡볶이와 튀김, 순대 (간 많이) 3종 세트를 종종 사들고 와 둘만의 조촐한 파티를 열곤 했다. 내 생일에도, 아내 생일에도 그렇게 파티를 열였다. 야식을 먹으며 VOD로 <무한도전>을 다시 보기 하는 게 우리 부부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이 별안간 '양심선언'을 했다. 일찍 자러 들어가도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무한도전을 몰래 봤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Q도. 안방과 아이들 자는 방이 마주 보고 있기는 하지만 텔레비전이 절대 보일 수 없는 위치였다. 그저 텔레비전 소리를 들은 거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텔레비전 화면이 안방 창문에 반사되어 소리와 함께 생생하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준이 양심선언을 한 이유는, 그럴 바에 우리도 함께 보자는 것이었다. 떡튀순도 함께 먹으면 더 좋고... 다 알면서 그동안 감쪽같이 모른척한 아이들에게 뭐랄까, 배신감을 느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일주일에 한두 번은 아이들과 함께 텔레비전 시청을 하게 되었다.
문득 이 에피소드가 생각난 건 <그 아이가 바로 나야!>라는 그림책을 읽을 때였다.
엄마 아빠,
내가 일찍 자기를 바라면
텔레비전 좀 꺼 주세요.
같이 손해를 봐야죠.
얼마나 당돌한 말인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준이 한 말과 겹쳐 한바탕 크게 웃었다.
아이들의 말과 생각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단순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아이와 나이 많은 아이"만 존재한다는 탈무드의 격언처럼,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남을 위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타적인' 사람이 드물고, 그만큼 존경받는 게 아니겠는가?
적어도 아이들의 말에는 꾸밈이 없다. 행간에 무언가를, 특히 날카로운 비수 따위는 숨기지 않는다. 거짓말을 해도 누구를 다치게 하거나 피해를 주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느끼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순수하다. 순수하다는 말에는 선과 악, 미와 추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 순수의 사전적 의미가 '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이 없음'이라는 것을 새겨두어야 한다.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게 되기를 원하는지 방향을 설정해 두었다면, 부모가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 아이가 바로 나야!>는 순수한 아이들에 관한 시(詩)다. 이스라엘의 동화작가(시인, 비평가) '유다 아틀라스'가 아이의 언어로, 아이의 사소한 순간, 경험, 어려움, 주저함, 사고방식 등을 포착한 짧은 시를 엮은 그림책이다. 그림은 이스라엘의 대표하는 삽화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인 '다니 케르만'이 그렸다. 순수한 아이들의 언어는 때로는 무례해 보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당당하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우리도 몇 차례는 겪었을 법한 상황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결국 같은 편에 서게 된다. 작가는 미사여구를 더하지 않고 존재 자체가 이미 시인 아이들의 다양한 순간을 탁월하게 포착해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아래의 두 작품은 어른에게 참 불편한 시다. 반성하게 하기도, 쓴웃음을 지게 하기도 한다.
엄마가 집에 왔는데
밖에서 짜증이 났나 봐.
그럼 안 봐도 뻔해.
내가 뭘 하든 상관없이
나는 혼나게 되어 있어.
엄마가 다이어트를 시작해.
그럼 아침마다 똑같아.
엄마는 저울에 올라가서
좀 있다 이렇게 말해.
저울이 고장 났나.
내게도 불편한 작품이 있다. 특히 아래의 시는 더욱 그렇다.
여자애 : 아빠, 이리 와서 여기 앉아요. 내 손 잡아 주세요. 내가 잠들 때까지 얘기해 주세요. 옛날 옛날 얘기요.
아빠 : 그래, 좋아. 옛날 옛날 여자애가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너무 좋아했단다. 밤낮 그걸 먹는 바람에 이가 상했대.
여자애 : 아니, 아빠. 걔 얘긴 엄마도 해줘요. 다른 여자에 얘기해 주세요.
아빠 : 좋아. 옛날 옛날 여자애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산수 공부를 안 했단다. 계산을 할 줄 모르는 바람에 언제나 가게에서 돈을 더 냈대.
여자애 : 그만, 아빤 항상 분위기 망친다니까! 교훈 없는 얘기로 해주세요.
아빠 : 그럼 뭐가 좋을까. 그래, 이거다. 옛날 옛날 여자애가 있었는데 '미안해', '고마워'를 할 줄 몰랐대. 이모들은 걔한테 짜증이 나서 다시는 선물을 안 해줬대.
여자애 : 진짜, 아빤 왜 이렇게 제멋대로예요? 내 단점만 늘어놓는 거잖아요!
아빠 : 아빠한테 제멋대로라니? 내 딸이 이런 말을 하다니! 옛날 옛날 여자애가 있었는데 아빠한테 예쁘게 말을 안 했대. 안 예쁜 말만 골라하니까 아빠가 다시는 얘기 안 해줬대.
여자애 : 옛날 옛날 틈만 나면 얘기를 핑계로 교육시키려는 아빠가 있었는데요, 이런 교육이 어떻게 될지 나를 두고 보면 알겠네요!
그렇다고 <그 아이가 바로 나야!>가 꼭 어른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만은 아니다. 순수한 아이들의 감성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 더 많다. 함박웃음을 짓게 되는 작품도 여럿 만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아직 여러분이 '나이 많은 순수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님이라면 <그 아이가 바로 나야!>를 읽어 보기를 강력히 권한다. 누구나 경험하는 삶의 터널(꼭 어둑 컴컴하고 불행하다는 의미는 아닌)을 지나오면, 터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주 잊게 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책이 잊었던 기억을 소환해 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 집에 그림책이 계속 늘어나는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바로 나야!>는 정말 어른을 위한 그림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