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읽는 그림책 : 우리 할머니 김복자 (서미경 글·그림)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
우리 어머니께는 '청춘 사진'이 없다. 당연히 그 시기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시절을 기록한 사진이 없다는 말이다. 세찬 삶의 파도에 휩쓸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는 일상을 누리지 못하셨다. 결혼사진 한 장 조차도. 그런 까닭에 육 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30대 중반이셨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5살 이전은 기억나지 않기에 어머니의 첫인상은 언제나 40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얼굴은 참 고왔다. 모진 세월의 격랑을 온몸으로 헤치며 살아온 터라 삶의 고단한 노정이 어머니 얼굴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지만, 그 흔적들까지도 내게는 고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20대 때 사진이 한 장 발견되었다. 다소 촌스러운 패션의 낡은 사진을 본 나는 처음에 그 사진 속 인물이 큰 누나일 거라 확신했다. 예쁜 얼굴 그대로 큰 누나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반전! 사진 속 인물은 어머니셨다. 그때 처음 앳된 모습으로 청춘 시대를 누리는 젊은 어머니를 보았다. 아니 누구의 어머니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그녀를 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훗날 누군가의 어머니가, 할머니가 되리라고는 그때의 그녀는 아직 상상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 사진을 계기로 어머니를 어머니 이전의 존재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외할아버지) 손 잡고 마실 가는 어린 소녀, 동무들과 숨바꼭질이며 술래잡기하는 개구쟁이 소녀, 너른 들판에서 나물 캐며 미래를 그리는 꿈 많은 사춘기 소녀로서의 어머니 존재를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한테도 청춘이 있었구나.'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낡은 사진 한 장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서미경 작가님이 쓰고 그린 <우리 할머니 김복자>는 우리들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의 청춘에 관한 그림책이다. 할머니 집은 지루하고 심심해 싫어하는 단이가 신비한 창문을 통해 할머니의 어린 시절, 청춘과 만나게 되는 마법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엄마에게 급한 일이 생기는 날은 단이가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기도 하다. 같이 놀 친구가 없는 할머니 집은 단이에게 너무 심심하다. 할머니한테 함께 축구하자고 조르지만 무릎이 아픈 할머니는 단이가 축구하는 걸 지켜만 본다. 심술 난 단이는 책장을 향해 축구공을 뻥 차는데 축구공이 사라져 버린다. 책장을 통해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단이는 어려서 눈치채지 못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복자'라고 소개한 또래 소녀를 만난 단이는 신나게 공차기를 하며 논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은 복자는 공도 잘 차고 뜀뛰기도 잘한다. 공을 가지고 노는 복자는 손흥민처럼 드리블을 하며 공을 치고 나가고 이를 쫓던 단이는 그만 넘어지고 만다.
이번에도 자신을 '복자'라고 소개한 누나를 만난 단이는 상처도 치료받고 함께 만화책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위대한 용사가 되어 우주 괴물이 된 복자 누나를 무찌르기도 한다. 숨바꼭질을 하다 숨은 누나를 찾기 위해 골목 밖까지 나와 찾아보지만 누나는 보이지 않는다. 배는 고프고 바람 끝은 서늘하다.
훌쩍이던 단이에게 자신을 '복자'라고 소개한 이모가 나타난다. 이모의 모습은 어딘지 엄마랑 똑 닮은 구석이 있다. 이제 슬슬 배도 고프고 돈가스를 해주겠다던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단이는 집을 찾지 못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한다. 단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자 복자 이모는 밥부터 먹고 집을 찾아보자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돈가스를 만들어 먹기로 하는데 이모의 음식 솜씨가 영 서툴다. 이전에 해본 경험이 없는지 요리책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기다리다 지친 단이는 깜빡 잠이 든다.
"단아, 돈가스 다 됐다. 밥 먹자!"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 단이의 두 손에는 오래된 사진 앨범이 들려 있다. 단이는 그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돈가스를 먹는다. 그건 할머니가 단이를 위해 손수 만들어 준 할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돈가스다. 하지만 단이도 할머니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할머니가 눈부시게 아름답던 청춘 시절에 길을 잃은 아이에게 요리책까지 봐가며 처음으로 돈가스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우리 할머니 김복자>는 아이들과 함께 읽어도 좋지만, 부모님께 읽어드리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작은 이벤트도 가져보면 좋겠다. 3대가 함께 부모님의 오래된 앨범을 한 장 한 장 살펴보며 추억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 타입 슬립은 불가능하지만 사진으로 떠나는 추억 여행은 가능하리라. 코로나 블루로 모두가 힘든 시기에 부모님께 '청춘의 시절'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만큼 좋은 효도도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