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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Dec 30. 2020

詩畵 '저녁이 있는 마을'

미처가 (美妻歌) 제7장 : 아내는 그리고 남편은 쓴다 (II)

<슈퍼 발차기님 작품 '저녁이 있는 마을'>

 첫 어둠이 사뿐히 대지에 내려앉으면   

 동네 어귀부터 차례로 작은달이 뜬다.

 골목길 저 끝까지 따스함이 스며들면  

 마을에는 어느새 저녁 서사가 피어난다.        


 퇴근길을 재촉하는 직장맘 혜진씨 두 손에는 

 미안함과 다급함이 숨죽인 채 들려 있고,

 엄마를 기다리는 일곱 살 아이의 얼굴에는  

 그리움에 지친 나른함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모처럼 일찍 퇴근한 이층 집 승화씨는

 젖은 머리에 수건을 둘둘 말고

 차가운 맥주를 더 차가운 컵에 한가득 따라 들고 

 최신 가요에 기꺼이 몸을 맡긴다.       

 

 운동이 삶의 전부인 골목슈퍼 연경씨는

 칼퇴근한 남편에게 계산대를 떠맡기고  

 스포츠센터 지하 수영장에서 

 가장 행복한 한 마리 인어가 된다.     


 결혼한 지 한 달 된 앞집 신혼부부는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동네 이곳저곳을 웃으며 거닐고,      


 그 모습을 본 뒷집 노총각 지훈씨는

 뭐가 그리 더운지 

 연신 손바닥 부채질을 해대며

 애꿎은 선풍기만 괴롭힌다.      


 삼삼오오 모여든 동네책방 寧宙에는

 저마다 책을 한 권씩 품고

 어제가 되어 버릴 오늘의 끝으로 

 나만의 여행을 떠난다.     


 첫 어둠이 사뿐히 대지에 내려앉으면

 잠자던 집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고 

 우리 마을에 저녁이 무르익는다. 

 삶이 이야기로 꿈꾸는 그림책이 된다. 


 미처가 (美妻歌)는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아내의 기행(奇行)과 박력(迫力)을 글로 풀어볼 요량으로 기획한 연재였다. 초기에 쓴 글이 재기 발랄함 그 자체였다면, 이후로는 글이 다소 무거워졌다. 엄격한 아내의 사전 검열과 그로 비롯된 창작자의 자체 검열이 글의 아우라를 잃게 하였다. (갑자기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한 구절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년에는 초심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아내가 그린 '저녁이 있는 마을'은 우리 부부가 꿈꾸는 동네 책방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영주(寧宙)'라는 공간을 통해 사람들의 이야기와 온기가 스며있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희망을 담고 싶었다. 아내의 그림은 완성한 지 꽤 되었으나 그에 맞는 글(시)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계속 미뤄왔다. 올해를 하루 남기고 밀린 숙제를 끝내는 마음으로 부족하지만 글(시)을 마무리했다. 어떤 브런치 작가님이 발행한 글도 계속 고치고 완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올해를 송두리째 누구에겐가 빼앗긴 기분이다. 내년에는 다시 일상을 돌려받고 싶다. '저녁이 있는 마을'의 삶,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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