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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07. 2021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

아닌 밤중에 제설작업

새해 첫눈이 왔다. 

눈송이가 흩날리기에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하얀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 

준과 큐 모두 아직 '오늘의 숙제'를 끝내지 못해 고군분투 중이었으나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으로 유혹했다.  


"눈 오는 거 너무 예쁜데 사진 찍으러 가자!"


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잠옷 위에 겉옷을 후다닥 챙겨 입었다. 

공부(숙제)만 안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할 수 있는 큐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이 시간이면 숙제를 끝내고 여유롭게 독서를 하고 있어야 할 준이 쭈뼛거렸다. 

오늘은 (스스로에게 내 준) 숙제가 너무 많단다. 

하지만 아빠가 그토록(?) 원하니 30분만 놀아준다나?    

흥칫뿡!


아내는 아이들에게 방한복을 단단히 챙겨 입혔다. 남극 탐험대인 줄 알았다. 

아이들 사진 몇 장 찍어줄 요량이라 그저 잠옷 위에 등산복 (대한민국 아저씨의 평상복) 하나만 달랑 입은 나와는 천지 차이었다.  

양말도 신지 않았다. 군대에서도 눈 치우는 일만큼은 즐거웠으니 아마도 난 전생에 삽살개였나 보다. 


눈 오는 밤, 밖에 나오니 역시 좋았다. 

몇 초만에 머리와 어깨 위로 함박눈이 소복이 쌓였다. 삽살개처럼 몸을 부르르 떨어 눈을 떨어냈다. 

우리 말고도 이미 설경에 흠뻑 빠진 주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아름다운 눈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아이들이 눈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눈 내리는 순간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경비 아저씨들은 그 순간에도 출입로에 쌓인 눈을 걷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눈 온 다음날 말끔하게 치워진 단지 내 길은 아저씨들이 흘린 땀의 결과였다. 

그새 큐가 어디서 구했는지 제설용 삽을 들고 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눈사람 안 만들어? 안 놀 거야?"

"이게 노는 거지!"  

도깨비 마법처럼 순간 나와 준의 손에도 제설용 삽이 하나씩 들렸다. 내 것은 대형이었다. 

셋이 나란히 서서 눈을 치웠다. 내가 밀고 나가면 큐와 준이 남은 눈을 모조리 밀어 버렸다.

잠깐 흉내만 내고 말겠지 했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기도록 제설작업을 했다. 

아닌 밤중에 제설작업이라니 군대 시절 생각이 났다. 막사 무너진다고 새벽 2시에 눈 치우던 그 시절!


그러고 보니 우리 어린 시절에는 자기 집 앞은 물론이고 골목길까지 함께 눈을 치웠다. 

동네 사람들끼리 묵시적으로 한 일종의 사회적 합의였다. 

다 탄 연탄을 발로 밟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가끔 그 시절 다 탄 연탄의 온기가 그립다.  


아이들이 열심히 눈을 치우고 있으니 주민 한 분이 삽을 들고 오셨다. 

한 마디 인사도 주고받지 않았으나 따스함이 스며 있었다.  

세상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다정하게 셀카를 찍는 부부, 눈사람을 만드는 아이들, 강아지와 산책 나온 모녀 각자가 눈 오는 밤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목표치를 달성하고 마저 사진을 찍었다. 

눈 치우는 게 노는 거라던 큐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눈 속에 파묻혀 눈사람이 돼버렸다. 


"노는 게 더 즐겁지!"


그래도 큐 덕분에 한동안 잊고 살던 '사회적 합의'를 실천했다. 

착한 일 한 큐에게 왠지 오늘 밤 첫눈이 되어 오겠다던 도깨비가 나타나 요술 방망이를 선물해 줄 것 같다. 

큐의 소원은 당연히 '내일 숙제 면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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