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언제가 써 보리라 계획한 소설 소재
유아기억상실증(Infantile Amnesia), 보통 3세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아주 드물게 돌잔치에서 뭘 집었는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사람들과 만나곤 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정말 기억력 하나는 우주 최고라 부를만한 초사이언급 인간(메타 휴먼) 일지도 모른다. 기억을 주관하는 해마(Hippocampus)에서 뉴런(신경세포)이 증식하면서 기존의 기억들이 삭제되기 때문에 오래된 기억들이 사라진다고 한다. (정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으로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주 복잡한 뇌과학의 영역이지만, 과감하게 생략하고 거칠게 비유하자면 저 옛날 녹음이 가능했던 카세트테이프를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새로운 노래를 계속 녹음하면 이전 노래들은 자연스레 지워져 버리는 저장 매체. 물론 이 저장 매체는 카세트테이프와 다르게 거의 반영구적으로 새로운 녹음 가능 구간이 생겨나지만. 어떤 코미디언이 예능 프로그램에서 해외여행 같은 특별한 경험은 다섯 살 이전에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초등학교 들어간 이후에나 해주라고 조언했는데 먼 훗날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와 같은 억울한 원망을 듣지 않으려면 그냥 흘려들을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은 어떤 기억을 최초로 기억할까? 하나의 인격체로서 세상에 처음 접속(log-in)한 순간을 인지하게 해 주는 원인은 무엇일까? 행복했던 기억, 가장 무서웠던 기억, 아니면 어느 평범했던 하루의 기억일까? 가로등은커녕 달빛조차 없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고속도로를 달리다 처음 눈에 띄는 이정표를 마주한 것처럼 없음(無)의 세계에서 있음(有)의 세계로 소환되는 그 결정적 순간을 기억하게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도 입력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세상과 처음 접속하게 될까?
내가 세상과 최초로 접속한 순간은 네 살 무렵으로 박제되었다. 우리 집 이삿날이었다. 기억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이다. 엄마와 나, 그리고 다섯 명 누나들 중 한 명. 당시 우리는 이사 중이었는데 기억 속에 이삿짐 트럭은 없었다. 대신 살림살이를 잔뜩 실은 손수레를 엄마가 끌고 어린 누나와 더 어린 내가 함께 밀었다. 한참 밀다 지루하면 엄마 몰래 손수레에 올라타기도 했다. 아직 70년대 말이었기에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난했던 그 시절의 가슴 아픈 사연인데 어린 나는 초라한 순간마저 놀이 인양 즐겼던 것이다. 그러나 왠지 이 장면은 흑백사진으로 저장되어 있다. 분명 기억은 생생한데 어디에도 색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왜 이 기억이 나라는 존재가 세상과 접속한 첫 번째 기억이 되었을까? 손수레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리던 경험이 당시 내게 가장 특별했던 경험이었을까, 아니면 해마가 마침 그때 갓 생성한 싱싱한 뉴런에 그 순간을 저장했기 때문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세상과 접속한 첫 번째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 기억이 기억나는지가. 누군가(그게 자신일 수도 있지만)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입력해 두었다가 특정 순간에 엔터(enter) 키를 눌러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건 메트릭스 세계관이다. 리비도(libido)가 그렇게 해줄는지도 모른다. 이건 프로이트 세계관이다. 무의식이 자아와 통합되는 최초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이는 칼 융의 세계관이다. 마블의 세계관, DC의 세계관……. 다른 무수한 기억 중에 인간이 세상과 처음 접속한 기억을 첫 번째라고 인지하게 하는 이유, 그것이 언제가 쓰고 싶은 소설의 소재이다. 오늘 무쓸모의 쓸모는 아주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이야기를 어떻게 소설로 발전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나 자신과의 수단이자 기록이다. 누군가 이 글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먼저 소설로 쓴다면 가장 먼저 그 글을 읽어 보고 싶다.
그런데 오늘 글과 상관없이(아님 있는지도) 자꾸 이 말이 떠오른다. 비트겐슈타인이 한 말이다. 왜일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