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 봄 2장
겨울의 끝자락, 바람 끝에 맴돌던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연무처럼 사라지고 미세한 온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면 텃밭러의 마음도 덩달아 분주해진다. 겨우내 절반쯤 잊고 지내던 텃밭이 개학 전날까지 끝내지 못한 방학 숙제처럼 눈앞에 바싹 다가와 있기 때문이다. 막 동면에서 깨어난 반달가슴곰처럼 한껏 기지개를 켜고 다가올 봄을 맞이할 채비를 한다. 13년 차 텃밭러로 처음 가꾸는 텃밭도 아닌데 무에 그리 호들갑이냐고 타박해도 어쩔 수 없다. 아무 이유 없이 설레는 계절, 봄이 성큼 다가왔으니 자꾸만 두근대는 심장을 누가 비난하랴.
제일 먼저 한 해 텃밭을 가꿔내기 위한 밑그림부터 그린다.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꿀 때는 아이들이 심고 싶은 식물들로 텃밭을 채웠다. 아이들은 하얀 도화지에 각자가 심고 싶은 식물을 그렸다. 하얀 도화지가 금방 총 천역색 꽃밭이 되었다. 빼곡하게 그려낸 도화지에서 덜어내는 게 일이었다. 그럴 시절도 있었건만 텃밭이 아이들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이제 그림 그리는 일도 소박한 텃밭러의 몫이 되었다. 그래도 한 평 텃밭에 무엇을 심을지 고민하는 일은 무척 즐겁다. 이면지를 가져와 텃밭을 닮은 직사각형을 대충 그리고 여섯 등분으로 나눈다. 한 줄 한 줄마다 심고 싶은 식물의 이름을 적어본다. 아무거나 대충 심는 것 같아도 한 평 텃밭에는 나름의 질서가 있다. 성장 속도나 자랐을 때 크기를 고려해야 한다. 햇빛이 모든 식물에게 공평하게 닿기 위해서다. 이것저것 고민하며 최상의 조합을 만들다 보니 문득 지난해 작황이 떠올랐다. 셀러리, 상추, 방울토마토, 애호박, 그리고 오이는 대풍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유독 가지, 고추, 깻잎, 토마토는 쓴맛을 보았다. 손바닥만 한 땅덩어리에서도 생의 희비가 엇갈렸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텃밭에도 정해진 답 같은 건 없었다. 해마다 결과가 천지 차이였다. 고민이 깊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텃밭러의 발길은 자연스레 단골 식물원을 향한다.
카렐 차페크가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진정한 정원가란 ‘꽃을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흙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조화로운 삶>에서 '건강한 곡식은 오직 건강한 땅에서만 자랄 수 있다'라고 지적한 것처럼 텃밭을 가꾸는 데 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한 평 텃밭러에게 흙은 그저 지구 표면에 퇴적된 물질로 땅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훌륭한 농부는 각종 재료를 배합하고 숙성시켜 흙과 함께 섞어주지만, 대부분 텃밭러는 거름과 비료와 퇴비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도 헷갈렸다. 하물며 부엽토, 배양토, 석회, 질산칼륨, 인산염 등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이럴 때 식물원(화원)은 망망대해에서 만난 등대와 같다. 중국 한나라의 전설적인 명의 화타가 사람 얼굴색만 보거나 맥을 짚는 것만으로도 병의 정도나 예후를 예견했듯이 단골 식물원 주인 부부도 텃밭러의 근심 어린 표정만으로 텃밭의 상태를 짐작했다. 진단이 나왔으니 처방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올해는 압축 계분 말고 발효 계분을 써 보세요.”라던가 “정 걱정되면 쑥쑥이 하나 데려가세요. 분갈이용이지만 텃밭에 사용해도 괜찮아요.” 한다. 그래도 미심쩍어 “퇴비는요?”하고 물어보면 “너무 과해요.”라는 정직한 대답이 돌아온다.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 장삿속 없는 주인 부부 역시 그랬다. 여름날 옥수숫대처럼 올곧았다. 식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존경스러웠지만, 선한 품성 덕분에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들르게 되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식물원에서 구매한 모종이나 씨앗은 이곳에서 가져간 것만큼 잘 자라지 않았다. 식물들도 주인의 품성을 닮았다.
발효 계분과 쑥쑥이 한 포대씩 찜해두고 발걸음은 씨앗을 모아둔 곳으로 향한다. 파종할 시기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미리 계획해 두었다고는 해도 한 무리의 씨앗 앞에 서면 또 한 번 자신을 시험하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 감춰둔 욕심이 자꾸만 탈출을 시도한다. 한 평 텃밭에 더는 심을 공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보이는 족족 마음이 간다. 마치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자아가 네댓 명은 더 들어있는 것 같다. ‘당근 심어볼까? 몇 해 전에 폭삭 망해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은데’, ‘오! 브로콜리. 항상 '브로콜리 너마저'를 부르게 했던 가혹했던 이름이여! 올해는 너를 데려가 볼까?’, ‘맞아. 부추! 비 올 때 부추전 해 먹으면 맛있잖아.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는데 올해는 너로?’ 이미 곁가지를 치고 뻗어 나가는 생각 나무를 멈출 방법이 없다. 가지를 실컷 뻗어 한계에 다다르게 하는 편이 오히려 효과적이다. 그럼 제풀에 꺾여 현실과 타협하게 된다. ‘욕심이야, 욕심. 얘네들 다 데려가면 결국 하나도 못 살리고 다 죽을지도 몰라.’ 결국 처음 이면지에 적었던 이름 중에 씨앗으로 심어도 잘 자라는 식물들만 골라낸다. 적치마(상추), 청치마(상추), 쳥겨자, 대파 외에 기어코 청경채 하나를 더 집었다. 채소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이 웬일로 볶은 청경채는 맛있게 먹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청경채를 과연 어디에 심어야 할까? 좁디좁은 한 평 텃밭에 청경채를 심을 공간이 있을까? 고민이 깊은 만큼 설레는 마음도 숨길 수 없다. 청경채 푸른 새싹들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현기증 날 지경이다.
봄맞이에 필요한 준비물을 챙기며 주인 부부에게 모종이 언제쯤 나올지 물어본다. 올해는 일찌감치 날씨가 따뜻해져 3월 셋째 주면 슬슬 나오리라고 예언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그럴 터였다. 식물원 주인 부부의 날씨 예보는 기상청보다 더 정확했다. 모종이 나오는 시기에 맞춰 다시 한번 식물원에 들르기로 약속한다. 오이, 애호박, 고추 3형제 (풋고추, 오이고추, 청양고추), 셀러리, 토마토, 방울토마토, 깻잎은 모종으로 심어야 더 잘 자란다. 물론 한 번에 그치지 않으리란 건 그간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아무리 공들여 가꾸고 똑같이 물 주어도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는 쑥쑥 자랐고, 시름시름 앓는 아이는 말라죽었다. 특히 지난해에도 대파는 세 번이나 도전했다가 겨우 체면치레했기에 올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그나마도 주인 부부가 북주기(식물이 넘어지지 않고 잘 자라기 위해 뿌리나 밑줄기를 흙으로 두두룩하게 덮어 주는 일)를 해주어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좌절을 맛보았을지도 몰랐다. 식물원은 텃밭러의 욕망이 거침없이 분출되는 곳이자 고민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 파라다이스다. 텃밭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달려가도 좋다. 마음씨 좋은 식물원 주인 부부가 언제나 그곳을 지키고 있으니까. 모종이 하루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 텃밭러의 시간은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