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트기까지 짜릿한 기다림이란 없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 봄 4장

by 조이홍

토요일 아침,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벼가며 겨우 잠에서 깨 첫째 아이와 길거리 농구하러 나섰다. 내가 생각해도 그리 좋은 아빠는 아니지만 '좋은 아빠 코스프레'라도 해야 아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았다. 사실 중학교 3학년이 된 아이도 재미없는 아빠보다 친구들과 농구하는 게 훨씬 재미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굳이 주말 아침부터 아빠와 농구하자는 걸 보면 어쩌면 아이도 '좋은 아들 코스프레'를 하는지도 몰랐다. 뭐,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부자 사이를 더 친밀하게 만들어 줄 터이니.


세 시간 넘게 아이와 함께 뒹굴며(하도 반칙을 많이 해서 실제로 농구장 바닥을 엄청 뒹굴었다) 농구를 즐기다 보니 부자간 없던 정(情)도 싹틀 것 같았다. 게다가 처음 보는 농거(바스켓맨)들과 2대 2 경기를 치러보니 초겨울 살얼음처럼 얇은 부자 관계가 아이스 링크 얼음처럼 제법 두터워지기까지 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빔국수로 점심까지 뚝딱 해치우니 비로소 오륜(五倫) 중 첫 번째로 꼽힌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모는 자식에게 인자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존경과 섬김을 다하는 사이가 얼추 자리를 잡은 듯했다.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털고 일어나 농구하러 나오길 잘했다 싶었다. 이 기세를 몰아 좋은 아빠 코스프레의 정점을 찍을 절호의 기회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아이에게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랜만에 텃밭 같이 갈래? 지난주에 상추랑 청경채 씨앗 뿌렸는데 오늘쯤 싹 틀 것 같은데? 너 어릴 때 텃밭 가는 거 무지 좋아했잖아."

"아니되옵니다, 아버님. 실컷 놀았으니 공부해야죠. 소자, 곧 중간고사 기간입니다."


첫째 아이는 학생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 '중간고사'로 아주 친절하고 상냥하게 아빠의 제안을 거절했다. 뒤에 붙일 말이 궁색했다. 그렇게 또 텃밭으로 향하는 '침묵의 계단'을 홀로 올랐다. 10대 아이와 호흡을 맞추느라 당장 쓰러져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이끌고 텃밭으로 향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지난주 뿌린 씨앗들이 싱그러운 새싹을 틔웠을 테니 반갑게 맞이해 주어야 했다. 자기 자신과 두터운 흙을 뚫고 세상에 선보인 기적은 칭송받아 마땅했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설레는 마음은 깃털보다 가벼웠다. 나풀나풀거리는 봄나비처럼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런데 요맘때면 눈에 띄어야 할 깃털이 보슬보슬한 병아리 떼 같은 개나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본디 텃밭에 이르는 길은 온통 개나리 천국이었는데 말이다. 아차 싶었다.


태재령(嶺)은 분당과 광주(신현리) 사이에 있는 험준한 고개다. 한랭 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은 태재령을 기준으로 유독 우리 마을에 집착했다. 거리상으로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음에도 태재령으로 인해 분당과 광주는 기온차가 무척 심했다. 4월 초, 이미 탄천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활짝 꽃망울을 피웠지만 개화선(開花線)이 아직 가파른 태재령을 넘지 못한 게 영 신경 쓰였다. 파종 이후 평균 기온이 10도를 웃돌았지만 혹시 새싹이 여전히 추위에 떨며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설레는 마음에 어느새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럴 리 없다 부정하면서도 그럴 것 같아 자꾸만 방망이질해대는 심장이 두 배는 더 빨리 뛰었다.

4월 2일.jpg <자세히 보면 푸릇푸릇한 새싹들이 보인다. 혹시 했으나 역시였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텃밭은 싸늘했다. 부지런한 텃밭러에게 벌써 찾아온 파릇한 봄은 아직 소박한 한 평 텃밭러에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 보니 청겨자와 상추 씨앗이 담긴 포장지에 발아하는 기간이 '파종 후 1~2주'라고 적혀 있었다. 조바심에 눈이 멀었는지 1~2주라고 쓰여 있는 글자를 '1주'라고 잘못 읽었나 보다. 기온은 제법 높았으나 일조량이 풍부하지 못했으리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발아 기간은 1주보다 2주가 더 현실적인 셈이었다. 혹시나 싶어 다시 한번 찬찬히 한 평 텃밭을 살폈다. 2mm도 채 안 되는 새싹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럼 그렇지! 개중에 성격 급한 녀석들이 있을 터였다. 세상이 궁금해 먼저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두꺼운 흙을 뚫고 나온 도전적인 씨앗들 말이다. 깃털 같고 통통하고 영롱한 껍질을 뚫고 돋아난 파릇한 새싹들이 무척이나 대견했다.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야호,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한 평 텃밭을 가꾼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새싹을 구분하지 못했다. 특히 이제 막 싹을 틔운 아이들은 도무지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씨앗을 뿌려 재배하는 채소의 단점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자라 어떤 식물인지 판별이 가능하기 전까지 잡초와 불편한 동거가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씨앗을 뿌리고 그 위에 긴 줄로 도표(道標)를 세웠다. 줄 밖에서 돋는 풀들은 잡초였고, 잡초여야만 했다. 올해는 밭이랑을 만들어 그 위에 직선으로 씨앗을 뿌렸다. 그럼 굳이 쓰레기가 되는 노끈으로 도표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새싹들은 직선과 한참 떨어진 곳에서 돋은 아이들이었다. 의아함은 곧 두려움이 되고, 두려움은 다시 현실이 되었다. 잡초임에 분명했다. 국어사전에서 '잡초'를 찾아보니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나서 자라는 여러 가지 풀'이라고 나와 있었다. 언빌리버블! 정말 절묘한 설명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심지 않아도 자라는 풀이 잡초였다. 이쯤 되면 '잡초 자연 발생설' 역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 직선에서조차 수많은 잡초가 자랄 터였다. 무엇보다 확실한 자연의 법칙이었다.


한 평 텃밭러는 흙을 가꾸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잡초와 싸우는 전사이기도 하다. 텃밭이 존재하는 한, 아니 흙이 존재하는 한 잡초 역시 존재할 터였다. 흙이 사라질 리 없으니 잡초도 영원하다. 잡초 역시 생명이고 그들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었다. 소박한 텃밭러는 모든 생명을 중시하지만 잡초에게만큼은 혹독했다. 보이는 족족 뽑아댔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한두 번 올라가는 텃밭이지만 물 주고 수확하는 일을 제외하면 대부분 시간은 잡초를 제거하는 일에 몰두했다. 잡초와 공존해야 채소들이 더 튼튼하게 자란다는 속설도 있었지만, 텃밭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잡초를 뽑고 있었다. 헬렌 니어링 여사가 <소박한 밥상>에서 고백한 자연의 경이로움은 보통의 인간인 내가 닿을 수 없는 경지였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소비할까? 식물은 땅에서 중요한 존재이다. 나는 나무를 자를 때면 나무에게 인사를 보낸다. 데이지나 팬지꽃을 뽑을 때나 사과나 무를 깨물 때면 내 마음은 오그라든다. 내가 뭐길래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단 말인가? 우리는 지상의 모든 것에 연민을 갖고, 최대한 많은 것에 유익을 주고, 최소한의 것에 해를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잡초는 한 평 텃밭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쓴 카렐 차페크 씨는 씨 뿌리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로 멋지고 짜릿한 순간이 '기다림'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하지만 한 평 텃밭에는 싹트기까지 짜릿한 기다림이란 없다. 지루함과의 싸움이자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잡초와의 전쟁이 있을 뿐이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물을 주고 불편한 곳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이제 한 주 남았다. 다음 주말에는 부디 작고 파리한 몸통에 두 장의 조그마한 잎이 달린 생명들을 만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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