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텃밭을 탐하지 말라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봄 6장

by 조이홍

"우리, 오늘부터 1일이다."


마블 영화에 나오는 귀여운 아기 그루트처럼 갓 태어난 쌈 채소 새싹들과 반갑게 인사 나눈 지 일주일이 지났다. 서툴지만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손길이 필요한, 알에서 막 깨어나 본능적으로 바다로 질주하는 아기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기다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분 좋았다. 왠지 내가 더 나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 온통 노랗고 하얗던 세상은 서서히 연한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점점 나이를 먹는 탓인지 꽃동산처럼 화려하지 않아도 파릇한 산천초목이 제법 보기 좋았다. 1cm를 잘게 쪼개면 10개의 1mm가 그 사이에 차곡차곡 채워지는 것처럼 우리가 그저 '봄'이라고 부르는 계절 속에도 형형색색 개성 강한 맞춤복을 차려입은 꼬마 봄들이 자기 차례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다음은 신록 차례일 터였다. 새싹이 두터운 땅을 뚫고 나오는 봄, 매화의 봄, 개나리의 봄, 목련의 봄, 동백꽃의 봄, 벚꽃의 봄과 술 한잔에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오던 늦은 밤 찐한 작별의 포옹을 나누었다.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거기에 복사와 도장까지 쾅쾅 찍었으니 석별의 아쉬움이 할퀸 상처가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계절은 파워포인트 화면처럼 한 컷 한 컷 변하지 않았다. 필름 영화처럼 무수히 많은 장면들이 겹치며 나아갔다. 계절의 순환은 경이롭고 아름다우면서 한편으로는 잔인하기도 했지만 또다시 가슴을 부풀에 오르게 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시구가 뱃속에서 안주로 먹은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섞여 자꾸만 몽글거렸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인은 떠나간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지만, 나는 떠난 봄꽃들을 웃으며 보내주었다.


쌈채소가 싹을 틔우고 텃밭의 주연 배우라 부를 초호화 채소 셀럽 군단이 - 오이, 호박, 고추, 토마토 등의 모종 - 나오기까지 2주나 걸렸다. 이렇다 할 일 없이 텃밭에 오른 소박한 한 평 텃밭러에게 2주라는 시간은 마치 2교시 끝나고 까먹는 도시락 맛이 났다. 꿀맛이었다. 비극의 주인공처럼 뽑혀야 할 숙명으로 태어난 잡초들은 아직 듬성듬성 자라 뜨거운 물을 부은 컵라면이 익는 시간 정도면 말끔히 정리됐다. 뽑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요맘때는 고된 물 주기도 시퍼런 물뿌리개를 4분의 3박자 지휘하듯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걸로 충분했다. 한 시간은 걸리겠지 작정하고 올라온 텃밭의 소일거리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려니 무언가가 자꾸 발목을 잡아당겼다. 휴가 나온 이등병이 자대 복귀하는 심정이랄까? 언젠가 포털 뉴스에서 '강남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일부러 야근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더랬다. 일찍 퇴근해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회사에서 밀린 일을 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기사였다. 나와는 '다른 세계' 이야기였지만, 솔직히 그들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너무 행복한데, 아내도 아이들도 너무 사랑스러운데 가끔 집 앞에서 서성거릴 때가 한 번은 있지 않은가. 요맘때는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꼬박꼬박 텃밭에는 왜 가냐며, 그럴 시간에 둘째 공부 좀 봐주라는 아내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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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랐어요!>

큰 키는 아니지만 살집이 제법 많은 우리 같은 사람은 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힘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도 숨이 가빠온다. 그래도 쑥쑥 자라는 상추며 청겨자, 루꼴라 싹들을 쳐다보느라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한다. 희끄무레한 줄기와 파리한 이파리가 너무 연약해 보여 잘 자랄까 걱정했는데, 한 주만에 제법 상추 모양을 갖추고 자태를 뽐내는 걸 보니 한시름 놓았다. 왠지 어깨도 으쓱했다. 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한 아이가 오늘 갑자기 아나운서 같은 발음으로 '아빠'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무려 '엄마'도 아니고 '아빠'라고 말하다니, 이 정도면 우리 아이 천재 아닐까 싶은 부모의 마음을 닮았다.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요렇게 귀여운 것들은 절대 먹지 않으리라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기도 했다. 한참을 신기한 듯 쳐다보다 복부에 가해지는 압박을 더는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누가 들으면 텃밭에서 역도 경기라도 하는 줄. 달랑 쌈채소 한 줄 반과 작은 화분이 채워졌을 뿐이지만, 이 정도라도 만석꾼이 부럽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휴대폰을 확인하니 고작 10분 지났다. 한가한 한 평 텃밭은 시간도 더디게 흘렀다. 더 이상 소일거리도 없으니 이웃 텃밭이나 살펴볼 겸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힘이 들어간 어깨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이게 다 뭐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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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텃밭러 4대 천왕들은 이미 쌈채소를 샐러드로 요리해 먹고 있었다>

한 평 텃밭 상추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유아라면 다른 텃밭의, 특히 텃밭 4대 천왕, 상추는 다 자란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재크와 마법의 콩나무'에 등장하는 콩나무처럼 일주일 만에 쑥쑥 자라 수확해도 될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한 번 수확해 맛 좋은 샐러드로 밥상에 올랐단다.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냐고 여쭤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다. 매일매일 올라와서 돌봐주고 물 주면 무럭무럭 자란다나. 맞는 말이지만 조금 난감했다. 학력고사, 아니 수능 만점자 인터뷰 기사를 보는 것 같았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고 잠은 8시간 이상 충분히 잤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아무튼 다른 텃밭의 쌈채소들을 보니 방금 전까지 농부로서 자긍심을 드높여 주었던 꼬맹이들이 순식간에 초라해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은 올라와 다정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공들여 물도 주고 영양가 풍부한 부엽토와 계분도 뿌려주었는데 정성이 부족했던 걸까? 짬짬이 날달걀 껍데기도 섞어주었는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텃밭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저 텃밭이 내 텃밭이었으면, 저 상추처럼 우리 꼬맹이들도 훌쩍 자랐으면' 하는 사심들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눈앞에 선악과가 있으면 뱀이 유혹하지 않아도 냅다 따 먹을 양 탐욕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텃밭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는 '인생 수업 학교'라는 초심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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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덩어리를 멈춰 세운 건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루꼴라를 심은 화분 앞,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있어 애써 뽑아낼 필요를 느끼지 않아 내버려 둔 잡초였다. 누군가 밟고 지나가겠지 싶었다. 그 잡초가 좁쌀만한 노란 꽃을 피웠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꽃이 바람에 흔들리니 마치 내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았다. '저들이 땅을 뚫고 나오는 멋진 순간을 지켜보았다고, 처음 만났던 설렘을 기억하라고. 너는 언제 누군가에게 그런 설렘을 준 적이 있느냐고, 그러니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어쩌면 다른 이들의 꽉 찬 텃밭과 아직 텅 빈 한 평 텃밭을 비교하니 조바심이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5월이면 다채로운 식물들로 그득할 텃밭이었다. 밑그림을 그렸고 그 순서에 따라 계획대로 진행했다. 욕심에 눈먼 스스로를 책망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 텃밭에서 오늘도 한 수 배웠다.

4월17일 (5).jpg <초보 텃밭러라면 루꼴라를 심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말 심기만 하면 쑥쑥 잘 자란다>

반장님(텃밭 4대 천왕 중 가장 넓은 텃밭을 소유한 왕 중의 왕)이 소일거리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불러 세웠다.


"OO 아빠, 우리 모종 좀 가지고 가요. 2월 말에 씨앗 뿌렸더니 얘들이 너무 잘 자랐어."


한사코 거절했지만 반장님의 선의가 더 강했나 보다. 이미 모종을 몇 개 뽑아 한 평 텃밭으로 가지고 오셨다. 상추며 쑥갓 같은 쌈채소들이었다. 이미 상추는 충분한데, 자리도 없고…. 속마음은 뾰족했는데 염치없는 손은 어느새 모종들을 받아 들었고, 눈은 비좁은 한 평 텃밭을 스캔했다. '어디에 심어야 할까.' 그래 인생이 뭐 꼭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몇 개 더 심는다고 무슨 일이 있을라고. 금방 순응하는 게으른 텃밭러였다. 반쯤 자란 쌈채소들이 얼마나 싱그러운지 어느새 또 흐뭇했다. 어쩌면 한 평 텃밭러는 지독한 속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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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님께 분양 받은 새 식구들. 얘네들은 왜 이리 싱그러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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