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봄 5장
모종삽을 이용해 1cm 깊이로 흙을 파고 훅 불면 날아갈 듯 작은 씨앗들을 조선 세종 때 농서인 <농사직설>에 나온 조파(條播, 줄 뿌리기)와 혼파(混播, 몇몇 다른 종류의 씨를 섞어 뿌림) 법으로 심은지 2주가 흘렀다. 지난주 새싹과의 첫 만남을 기대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텃밭에 올랐지만, 공연이 끝난 텅 빈 무대처럼 한 평 텃밭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한숨 섞인 탄식이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증가시키고 마땅히 새싹이 있어야 할 자리를 꿰차고 앉은 잡초만 성나게 노려본 토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잔뜩 기대에 부풀어 '침묵의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기적! 드디어 한 평 텃밭에 파릇한 새싹이 돋았다.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들이 계단 중턱에서 반갑게 인사할 때부터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4월 2일(토) 15시부터 4월 9일(토) 15시까지 정확히 168시간 사이에 자연이, 흙이, 씨앗이 인간은 흉내 낼 수 없는 기적을 행했다.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카렐 차페크 씨는 식물이 씨앗 아랫부분에서 움튼 다음, 씨앗을 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땅 위로 고개를 밀어 올리기에 곡예사 같다고 말했다. 적확하면서도 근사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굳이 거기에 한 마디를 보태면 꼬마 차력사라고나 할까? 그 작고 여리한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올까 싶었다. 문득 궁금했다. 그런데 왜 인간은 그 위대한 순간을 목격할 수 없을까? 겨우 주말 반나절만 텃밭에 투자하는 소박한 텃밭러는 차치하고서라도, 주위에서 씨앗이 두터운 땅을 뚫고 솟아나는 자연의 경이를 직접 본 행운아는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에 7일을 텃밭에 머문다는 '텃밭 4대 천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쯤 되면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이 떠올랐다. 전자를 총에 넣고 2개의 슬릿(틈)을 향해 쏘면 슬릿 모양대로 전자가 모이리라 모두가 예측했다. 이는 당시 과학계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전자는 무작위로 나타났다. 전자는 물질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가지며, 관찰자가 관찰할 때는 물질의 성질을,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을 성질을 보인다는 것이 이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이것이 바로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이다. 관찰자의 '보는 행위' 자체가 전자의 성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새싹도 관찰자 효과 때문에 텃밭러들이 보지 않을 때만 돋아나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무도 그 경이로운 순간을 목격할 수 없단 말인가! 괜스레 들뜬 마음이 엉뚱한 상상만 불러일으켰다. 아무튼 일단 돋아난 여리한 몸통에 두 장의 파리한 이파리를 가진 무리들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존재가 이름을 불러주자 아름다운 꽃이 된 것처럼 내게로 와 잊히지 않는 새싹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은 상추, 청겨자, 루꼴라였다. 줄 뿌리기 한 그대로 한 줄로 나란히 이랑에 자리를 잡았다. 얼핏 보면 다들 비슷비슷해 보여도 각자가 자기만의 색깔과 형태를 뽐냈다. 상추 새싹은 싱싱한 연둣빛에 달걀 모양의 이파리를 양쪽으로 하나씩 지녔고, 청겨자 새싹은 짙은 연둣빛에 마치 나비 날개를 연상시키는 예쁜 이파리가 특징이다. 루꼴라 새싹은 옅은 녹색에 살짝 붉은기가 돌며 청겨자 새싹과 마찬가지로 허공을 비행하는 노랑나비의 날갯짓 같은 이파리를 가졌다. 그 모습을 보며 땅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연신 곱씹었다. 올해도 여지없이 한 평 텃밭을 찾아준 새싹들이 고마웠다. 사소한 실패도 물론 있었다. 함께 파종한 씨앗 중에 청경채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2주면 청경채 씨앗이 발아하기에 충분한 시간일 터였다. 게다가 중국 화중 지방이 원산지인 청경채는 서늘한 곳을 좋아해 오히려 여름철 재배가 어려운 특이한 채소였다. 지난 2주간 간간이 쌀쌀하고 틈틈이 흐린 날씨로 내심 씨앗들이 얼지 않을까, 그래서 새싹이 늦게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청경채만큼은 꼭 발아하리라 믿었던 이유였다. 그런 청경채 씨앗만 발아하지 않았으니 새씩들을 만난 기쁨도 잠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만, 청경채 모종이 있던가?' 휴대폰을 꺼내 얼른 단골 식물원에 전화했다. 쌈채소를 제외한 모종들은 아직 2주는 더 기다려야 나온단다. 쓰라렸던 지난해 '대파' 농사 실패가 떠올랐다. 무려 네 번이나 씨앗을 뿌렸는데 단 한 차례도 발아하지 않았더랬다. 결국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모종을 심어 13년 차 텃밭러가 겨우 체면치레했던 아픈 기억이었다. 한 평 텃밭은 안 되는 식물은 정말 안 되는 까칠한 성격을 가진 땅이었다. '뿌리기만 하면 쑥쑥 자라는 상추나 루꼴라를 더 심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청경채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텃밭에 올라갈 때마다 들고 다니는 에코백에서 청경채 씨앗을 꺼내 지난번 심었던 그 자리에 다시 뿌려주었다. 2주 더 기다려 줄 테니 부디 실망시키지 않기를.
'싹수가 노랗다'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싹수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1) 앞으로 성공하거나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
2) 식물의 씨앗에서 제일 먼저 트이는 잎
싹수가 노랗다는 말은 물론 좋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가능성이나 희망이 애초부터 보이지 않아 개선의 여지가 없을 때 사용한다. 씨앗에서 제일 먼저 트이는 잎(새싹)이라면 당연히 초록빛이나 연둣빛이어야 하는데 노랑빛이니 온전히 자랄 가능성이 희박할 터였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새싹이 꼭 초록빛이나 연둣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분홍빛도 있고 주홍빛도 있다. 진한 자줏빛 새싹이 있는가 하면 희끗한 색, 연보라색도 있다. 당연히 노란색(황금색)도 있다. 수천수만 가지 식물이 있는데 이들 새싹이 모두 초록 계열로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다양성 존중이 시대의 화두인 만큼 '싹수가 노랗다'는 말에 드리워진 부정적 시각이 재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노란 새싹들에게 미안하지 않게 말이다.
청경채 새싹이 나오지 않아 심통난 텃밭러가 별걸 다 꼬투리 잡는다. 한 평 텃밭이 이렇게 텃밭러를 좀스럽게 만든다. "텃밭,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