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텃밭에 담긴 욕망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봄 7장

by 조이홍

친절한 식물원 주인 부부의 선의라도 거절해야 했다. 애초에 한 평 텃밭에 올 운명이 아니 것들을 억지로 담으려다 밑그림이 엉망이 되었다. 식물원에 들어서자마자 지난주 겨우 잠재웠던 탐욕이 경칩이면 본능적으로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개구리처럼 번쩍하고 눈을 떴다. 지난밤 굳게 다짐했던 맹세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성보다 딱 한 걸음 앞서 있던 욕망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모종들을 쓸어 담았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에게 허락된 땅은 한 평뿐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넘칠 만큼 담고서도 눈매 선한 주인 부부가 덤으로 챙겨준 딸기 모종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쩌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밑그림대로 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지난주 이웃 텃밭러에게 쌈채소 모종을 받은 순간부터, 아니 그전에 대파 심을 자리에 루꼴라를 심었을 때부터, 아니 이면지에 4색 볼펜으로 어디에 무얼 심을지 고심하던 순간부터 한 평 텃밭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리란 걸 예상했을지도 몰랐다.


주말 저녁 식물원에 전화를 걸어 모종들이 입고되었는지 확인했다. "네, 오이나 호박 같은 웬만한 모종들은 다 입고됐어요. 내일 나오시면 돼요."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는 인사가 튀어나왔다. 감사하다는 말이 나쁠 거야 없었지만 그 상황에 튀어나올 말은 아니었다. 수화기 너머로 피식하고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다음 날 일찍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통화를 끝내자마자 밑그림부터 꺼내 들었다. 지난주 예상치 못한 경로로 입수된 쌈채소 모종 4개가 이미 한 평 텃밭 일부를 차지한 터라 밑그림 수정이 불가피했다. 빨강 색연필로 쭉쭉 줄을 그며 이리저리 식물 위치를 조정하고 과하지 않게 필요한 모종 개수를 헤아려 보았다. 다행히 원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오이 3개, 애호박 1개, 고추 2개, 청양고추 1개, 아삭이 고추 2개, 깻잎 1개, 샐러리 6개, 토마토 1개, 방울토마토 1개면 다소 과해도 한 평 텃밭에 담을만하다 싶었다. 메모지 한 장을 꺼내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으며 이번에는 딱 계획한 만큼만 담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탐욕 앞에서 두 번이나 무릎 꿇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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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한 평 텃밭에 모종 심는 꿈을 꾸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은 아무리 많은 모종을 심어도 채워지지 않았다. 심다 지쳐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었다. 다 심었다 한숨 돌리면 어느새 텃밭이 텅 비었다. 밤새 채워지지 않는 한 평 텃밭에 모종을 심고 또 심었다. 다음 날 아침,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식물원으로 향했다. 꿈속 노동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입이 다 쌉싸름했다. 오죽하면 정신 차리려고 마신 에스프레소 맛이 달달했을까. 몸 상태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파라다이스에 도착하면 몸도 마음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가벼워질 터였다.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뛰었다. 지난번 들렀을 때 휑했던 식물원 앞마당이 각종 모종과 형형색색 꽃들로 넘쳐났다. 딱 요맘때만 경험할 수 있는 황홀한 봄의 정취다. 라벤더, 로즈메리, 스피아민트, 레몬밤, 애플민트, 바질 등 허브 계열 식물은 기분 좋은 향기로, 팬지, 백일홍, 금잔화, 수국, 메리골드, 제라늄은 총천연색 빛깔과 향긋함으로 오감을 자극했다. 아래로 내리꽂는 롤러코스트에 앉아 있는 듯 기분이 아찔했다. 그리고 앞마당 가장 너른 곳에 애타게 찾던 모종들이 수줍은 자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여 종이 넘는 어린 식물들이 '나 좀 보세요, 나를 데리고 가요.' 속삭였다. 재빨리 지갑 속에 넣어둔 메모지를 꺼냈다.


풋내기 텃밭러 시절 시도했다가 쓴 맛을 경험했던 수박과 참외 모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 번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던 얄미운 파프리카도 못 본 척했다. 이미 충분히 자란 상추와 청겨자가 있으니 쌈채소도 건너뛰었다. 뚜벅뚜벅 걸어 오이 모종 앞에 섰다. 세상에 막 나와서 파릇파릇하니 생기 넘쳤다. 그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아이로 3개를 골라 담았다. 다음으로 마디 호박(애호박) 1개, 풋고추 2개, 청양고추 2개, 아식이 고추 1개를 담았다. 그냥 먹어도 좋고 태국식 돼지고기 덮밥에 바질 대신 넣어도 좋은 셀러리 모종도 6개 골라 담았다. 방울토마토와 대추 방울토마토도 한 개씩 골랐다. 원래 계획은 일반 토마토였는데 지난해 수확량이 턱없이 적었던 품종이라 방울토마토로 급하게 변경했다. 쌈채소 중 유일하게 깻잎만 먹는 둘째 아이를 위해 깻잎 모종도 1개 집어 들었다. 텅텅 비었던 바구니가 어느새 모종들로 붐볐다. 이때 돌아 나오면 아무 문제도 없을 터였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다. '구경만 해야지.' 단단히 벼르고 식물원 앞마당을 어슬렁거렸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까. 쌈채소 모종들 사이에서 원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케일과 눈이 마주쳤다. 아, 맞다. 아내가 좋아하는 쌈채소였지. 큰일 날 뻔했네 하며 케일 모종 하나를 집었다. 어라, 그 옆에 가지도 있네. 아내가 가지 밥 해서 비법 양념에 비며 먹으면 맛있다고 했는데 하며 또 하나 집어 들었다. 맞은편에 피망이 눈에 띄었다. 딱히 사고 싶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손이 닿았다. 그 옆에 있는 롱 그린 고추에도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고추는 역시 롱 그린이지! 그렇게 또 하나. 정신을 차려 보니 생각지도 않은 모종 4개가 손에 들려 있었다. 식물원이 이렇게나 위험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얼마나 더 골라 담을지 몰랐다. 골라 담는 재미가 있다는 아이스크림 가게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아내 부탁으로 집안에 둘 화분에 심을 허브 4종 세트(잉글리시 라벤더, 스피아민트, 레몬밤, 로즈메리)를 고르고 서둘러 계산하려는데 친절한 주인 부부가 "올해는 딸기도 한번 도전해 보세요." 하며 딸기 모종 하나를 덤으로 주었다. 입으로는 괜찮은데 하면서 손은 벌써 딸기 모종을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소박한 텃밭러도 결국 욕망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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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도 많은 데다 웃거름으로 줄 4kg짜리 압축 계분까지 들고 '침묵의 계단'을 오르려니 눈앞이 깜깜했다. 둘째 아이를 꼬드겼다. "사랑하는 Q, 우리 텃밭 같이 갈까?" 했더니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한다. 일요일에는 자기도 마음 편하게 쉬고 싶다나. 아니, 누가 못 쉬게 했나?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구시렁구시렁하는 아이에게 '게임 1시간 이용권'을 제안했다.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아이가 "어서 가시지요, 아버님." 갈 길이 멀다며 발걸음을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모처럼 부자가 사이좋게 텃밭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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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오른 텃밭은 지난주와 또 달랐다. 상추와 루꼴라가 제법 자랐다. 청겨자는 예상보다 자라지 않아 속상했지만 청경채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두 주나 더 기다렸지만 결국 청경채 새싹은 나오지 않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아이는 잡초를 뽑고 아빠는 물뿌리개로 식물들에게 단비를 내려주었다. 지난주 내내 비가 오지 않아 땅이 바싹 메말랐으니 새싹들 갈증이 심할 터였다. 둘째 아이 덕분에 깔끔하게 정리된 텃밭에 모종을 심을 차례였다. 청경채 씨앗을 심었던 자리에 케일, 딸기, 그리고 깻잎을 심었다. 딸기는 모종 하나만으로도 엄청 뻗어나가는 식물이라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부디 너무 잘 자라지 말라고 빌었다. 그 옆 라인에는 갖가지 고추들과 피망을 심었다. 한 평 텃밭에서 햇볕이 가장 잘 드는 곳이었다. 올해는 반드시 고추 농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다음 라인에는 한 평 텃밭의 자랑 오이 삼총사를 심었다. 묘하게도 오이만큼은 다른 텃밭보다 잘 길러냈다. 올 해도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최대한 간격을 벌려 심고 그 라인에 다른 식물은 심지 않았다. 다음에는 애호박, 방울토마토, 대추 방울토마토, 그리고 가지를 심었다. 애호박은 사방팔방으로 잘 자라는 식물이라 가장 구석진 곳에 심어서 한 평 텃밭 둘레로 자라게 하는 고급 기술이 필요했다. 13년 차 텃밭러에게 그 정도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방울토마토는 오이 이상으로 쑥쑥 자라 고추 지지대보다 긴 지지대가 필요했다. 마지막 라인에는 아삭한 식감이 일품인 셀러리를 심었다. 비로소 한 평 텃밭이 완성되었다. 사실 처음 그렸던 밑그림에는 인간의 욕망이 1g도 담겨 있지 않았다. 모범 답안처럼 식물과 식물 사이의 간격이 넓고 품종별로 분류해 두었다. 현실은 전혀 달랐다. 고추와 셀러리는 그림보다 훨씬 빽빽하게 심었다. 갑자기 들인 딸기 모종으로 쌈채소도 이곳저곳에 나눠 심었다. 발아하지 않은 청경채는 빠르게 포기했고, 대파 심을 자리에는 루꼴라가 무럭무럭 자랐다. 한 평 텃밭에 인간의 욕망이 그득했다. 그러고도 5월 말이 되면 대파를 어디에 심을지 고민했다. 고작 한 평 땅덩어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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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4일 (66).jpg <비로소 완성된 한 평 텃밭, 이제 여름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마무리로 압축 계분 한 줌씩 모종 위에 뿌려 주었다. 화학 비료를 뿌려 주면 잘 자라지만 되도록이면 한 평 텃밭에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한 평에 뿌려봐야 얼마나 뿌리겠냐만은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잡초 제거로 충분했다. 대신 짬날 때마다 열심히 토선생(土龍, 지렁이)을 모셔오리라 마음먹었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 부지런 좀 떨면 건장한 토선생들을 스카우트해 올 수 있을 터였다. 그 사이 자기 일을 끝내 심심해진 둘째 아이가 수돗가에서 옷이 흠뻑 젖도록 물장난을 했다. 그러다 그만 일하고 있는 내게 물이 튀었다. 많이 젖지도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말들은 다시 주워 담지 못했다. 아빠 도와주러 왔다가 물장난 좀 한 것뿐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봉변을 당한 셈이다. 아이한테 미안했다. 아이들이 한창 텃밭에 다닐 때는 물총도 챙겨 와 신나게 놀곤 했다. 아이들에게 텃밭은 자연 그대로의 놀이터이기도 했으니까. 아이들은 그대로인데 아빠만 변했다. 요구하는 게 많아지고 지켜야 할 원칙들만 늘어놓았다. 괜히 멋쩍어 "다음에는 물총 가지고 와서 신나게 놀아 볼까?" 했더니 아이도 피식 웃는다. 새싹도 아이도 한눈 한 번 팔면 몰라 보게 부쩍 자란다. 어느 날엔가는 더 이상 텃밭러의, 아빠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그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소임을 다할 뿐이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적당히 유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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