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혼돈의 상추버스(Sangchooverse)

<소박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5월은 푸르구나 상추는 자란다

by 조이홍

소박한 한 평 텃밭러에게 봄의 정점 5월은 축복받은 달이다. 적당히 선선한 아침과 저녁, 보드라운 봄 햇살을 받으며 독서하기에 그만인 오후, 계절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즐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날씨는 없다. 원래 밑그림에서 살짝 틀어졌지만, 본디 인생이란 게 불가항력적 사건의 연속이므로 5월의 한 평 텃밭도 제법 위용을 갖추었다. 잘 정돈된 텃밭에서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는 새싹들이 커나갈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수확물로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좋아지는데 1%도 기여하지 못하지만 물색없이 좋기만 하다.


그간 소소한 사건·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모종으로 심은 오이 하나가 바싹 말라죽었다(신이 그 가여운 어린 모종과 함께 하기를). 오이 모종 세 개를 나란히 심었는데 그만 가운데 모종만 탈이 난 것이다. 똑같은 환경에 - 볕이 좋은 자리, 시원한 수돗물, 풍부한 영양의 계분으로 지력을 한껏 고양시킨 흙 - 놓인 식물의 삶에도 희비가 엇갈렸다. 오이 모종이 떠난 휑한 자리는 당귀 모종이 알차게 들어앉았다. 우연한 기회에 당귀전(무슨 고전 제목 같지만, 부침개를 말한다)을 맛본 아내가 당장 텃밭에 당귀를 심으라 하명한 탓이었다. 어쨌든 한 평 텃밭은 계속되어야 하고, 식물들은 살아가야 하니까. 쌉싸래하면서 고소한 루꼴라를 내어주던 화분에도 변화가 생겼다. 피자나 스파게티와 잘 어울리는 루꼴라는 오리엔탈 드레싱과 어우러진 고급진 샐러드로 다시 태어나 식탁을 지중해풍으로 근사하게 변신시켜주고는 명예로운 임무를 다했다. 헬렌 니어링 여사가 말한 것처럼 '자연이 차려 준 식탁, 샐러드'는 물로 깨끗하게 씻은 후 최소한의 드레싱만 첨가했을 때 가장 맛이 좋았다.


고즈넉한 5월의 텃밭은, 텃밭을 가꾸지 않거나 가꾸고 싶지만 여건이 닿지 않는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이상향(理想鄕)이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일주일에 한두 차례 물 주기만 하면 되고 빼꼼히 흙 밖으로 얼굴을 내민 잡초들도 호기롭게 바라볼 만큼 여유롭다. 언젠가 녀석들에게 호되게 당할 날이 오리란 걸 알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지그시 한번 눈감아 준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식물들에게 소박한 텃밭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적어도 5월에는, 이게 전부이다. 더 튼튼하게 뿌리내리라고, 더 빨리 자라 결과물(열매)을 내놓으라고 닦달해봤자 소용없다. 욕심은 오히려 화를 부를 뿐이다. 언제였던가, 아직 풋내기 시절 탐욕에 눈이 멀어 다량의 질소비료로 그 불쌍한 식물들을 불태워 보냈던 때가….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따사로운 5월 햇살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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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한 가지 깜빡했다. 5월에는 어린이날도 있고, 어버이날도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 불리지만, 텃밭러들에게 5월은 '상추(쌈채소)의 달'이기도 하다. 불과 2~3주 전까지만 해도 파릇파릇 귀여운 새싹이었는데 어느새 다 자란 폭넓은 어른 상추가 되었다. 오죽하면 음식을 어느 결에 먹었는지 모를 만큼 빨리 먹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마파람에 상추 자란 듯하다'라고 할까(설마 이런 속담이 있는지 찾아보는 건 아니겠죠?). 동화 '재크와 콩나무'를 실사판 영화로 만든다면 제작비 절감을 위해 콩나무 대신 상추를 심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다. 어쩌면 5월이라는 시간은 상추에게만 빨리 흐를지도 몰랐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상추를 보면 신기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하다.


게다가 올해는 한 평 텃밭에 쌈채소 씨앗을 흩어뿌렸다. 겉봉투에 ‘축면 계통 상추, 치마 계통 상추, 샐러드 계통 상추, 오크계 상추 등 4~6 품종이 혼합되어 있다(이것 봐라, 종묘상들도 뭐가 들었는지 정확히 모를 정도다)’라고 적혀 있던 씨앗들이었다. 욕심 반, 걱정 반으로 작은 홈 하나에 색이 다른 씨앗을 서너 개 심었더니 상추 라인은 한 구멍에서 여러 종류의 상추가 자라는 '대혼돈의 상추버스'로 변했다. 한 뿌리에서 적치마, 청치마, 오크, 로메인까지 자라니 흡사 GMO(유전자 변형)처럼 보였다. 얼마나 쑥쑥 자라는지 고작 한 평 텃밭 한 귀퉁이에서 자랄 뿐인데 먹는 속도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날마다 성대한 삼겹살 파티를 열 수도 없는 일이니(돼지고기 값이 금값이다) 무척 난감했다. 설상가상으로 요맘때 상추 소비의 한 축을 담당해주던 아래층이 이사한 터라 냉장고에 상추를 담은 용기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우주 최강 마법사, 아니 요리사의 도움이 절실했다.

5월15일 (18).jpg <질서 정연한 이웃 텃밭, 왜 북한 열병식 느낌이 날까?>

아내는 유자청으로 맛을 낸 일품 쌈장을 만들어 끼니때마다 상추와 함께 식탁에 올렸다. 제육볶음에도, 닭갈비에도, 오징어볶음에도, 심지어 고등어구이와 임연수어구이 곁도 상추가 지켰다. 상추는 그 모든 요리와 궁합이 잘 맞았다. 하지만 어떤 날은 흰밥과 상추, 쌈장만이 식탁을 지키기도 했다(혹자들은 이를 머슴밥이라 부른다). 상추에는 각종 암 및 심혈관계 질환을 예방해주는 비타민B, C와 항산화 작용, 유해산소 예방, 피부 건강 유지에 도움을 주는 베타카로틴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슈퍼 푸드'라고 불리기도 한다(세계 10대 슈퍼 푸드는 귀리, 브로콜리, 블루베리, 아몬드, 적포도주, 녹차, 마늘, 시금치, 토마토, 연어네? 상추는 없으므로 11대 슈퍼 푸드인 걸로). 육류와 함께 섭취하면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것을 막아주고 피도 맑게 해 준다. 그러니 고기를 먹을 때 가능하면 상추를 함께 먹는 것이 좋다. 물론 깨끗하게 씻은 상추를 손으로 썩둑 잘라 간단한 드레싱과 함께 샐러드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다. 상추 덕분에 5월의 식탁은 언제나 소박하지만, 몸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였다. 매번 변비로 고생하는 아내도 5월만큼은 쾌변의 나날을 보낸다. 그게 다 상추 덕분이다.

상추샐러드.jpg <손으로 썩둑썩둑 자른 상추와 먹다 남은 치킨, 모짜렐라 치즈로 완성한 근사한 샐러드>

'상추'의 어원은 날 것 그대로 먹을 수 있다고 해서 '생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고대 로마인들 역시 현대와 비슷한 방법으로 상추를 소비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6~7세기)에 이미 상추를 소비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생산 및 유통되는 상추의 종류는 500여 종이 넘는데 통상 잎의 모양과 색상에 따라 적상추와 청상추, 잎의 결구성에 따라 잎상추와 결구상추(여러 겹의 잎들이 둥글게 겹쳐지면서 속이 드는 상추)로 분류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잎상추가, 미국과 일본에서는 결구상추가 주를 이룬다. 품종이 많다 보니 이름 또한 다양하고 복잡하다. '치마'라 불리는 상추는 잎의 모양이 긴 타원형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축면'이라 불리는 상추는 잎에 주름이 많아 쭈글쭈글해 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뚝섬적축면'처럼 지명이 들어가기도 한다. 상추 이름에 얽힌 비밀을 알았으니 다음 회식 자리에서 상추쌈 먹을 때 아는 체 좀 해야겠다.


주말 저녁, 윗집에서 또 운동회라도 열렸나 싶었다. 귀여운 아이가 이리로 쿵쿵쿵, 저리로 쾅쾅쾅 신나게 뛰어다녔다. 평소보다 층간 소음이 과한 걸 보니 아이가 저녁밥을 많이 먹었나 보다. 참다못해 냉장고로 달려가 아침 일찍 텃밭에서 수확해 온 싱싱한 상추를 꺼냈다. 정성스럽게 포장해 둘째 아이에게 심부름시켰다. 포스트잇 메모와 함께. "오늘 텃밭에서 따 온 싱싱한 5월의 상추입니다.온 가족이 맛있게 드세요." 위층에 다녀온 둘째 아이 손에 검은 비닐 봉지에 담긴 탐스러운 포도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후식으로 먹으면 그만이겠다 싶었다. 어느 순간 윗집이 조용해졌다. 냉장고에 상추가 있어 다행이었다. 몸에 좋은 상추가 삶에도 이렇게 도움을 준다.

5월11일 (5).jpg <5월의 목가적인 한 평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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