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여름 1장
“야, 여름이다!”
드디어 소박한 텃밭러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여름이 왔다. 북반구에서는 6월부터 8월까지를, 남반구에서는 12월부터 2월까지를 통상 여름이라고 부른다. 한 평 텃밭이 북반구에 자리 잡은 덕분에 애쓰지 않아도 여름이 찾아왔지만, 노력 없이 얻었다고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아무튼 여름아, 오늘부터 1일이다!
국립국어원은 고유 명사 ‘여름’에 대한 명확한 어원을 알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열매를 맺는 계절이라는 의미의 ‘열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절기상으로는 입하(立夏, 5월 5일)부터 입추(立秋, 8월 7일) 직전까지고, 기상청에 따르면 일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으로 올라간 뒤 다시 떨어지지 않는 첫날을 기준으로 나흘 전부터 나흘 후까지 9일 동안의 평균 기온이 이틀 연속 유지되는 날을 여름의 시작일로 삼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일 평균 기온이 20도∼25도이고 일 최고기온이 25도 이상이면 초여름, 일 평균 기온이 25도 이상이고 일 최고기온이 30도 이상이면 한여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 뭐 그리 복잡해, 골치 아프게.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온종일 더우면 여름이(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어렵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부르지만, 한 평 텃밭에서는 여름이 진짜 결실의 계절이다. 여름의 어원이 열음이라는데 동의하는 이유다. 한 평 텃밭에서 봄을 상징하는 상추가 뜨거운 초여름 햇볕에 서서히 시들어 갈 때쯤이면 여름 채소들이 본격적으로 자태를 뽐낸다. 올해 한 평 텃밭의 여름 라인-업은 오이, 호박, 고추, 가치, 샐러리, 그리고 토마토와 딸기까지 풍성하다.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좁디좁은 한 평 텃밭을 가꾸느라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빗물처럼 흘러내려도 여름이 마냥 신나는 이유다. 한 평 텃밭러도 결국 농사꾼이니 수확의 보람만큼 큰 기쁨은 없을 터였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여름은 달라진 옷차림에서 시작한다. 봄 텃밭에 오를 때마다 유니폼이라도 되는 양 걸쳐 입던 빨간색 바람막이 점퍼는 옷장에 보관했다. 여름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원한 반바지와 하와이 해변을 연상시키는 반팔 티셔츠를 꺼내 입고 밀짚모자로 마무리를 장식한다. 밀짚모자는 마블 히어로의 첨단 슈트나 쫄쫄이 의상처럼 소박한 텃밭러의 여름을 상징하는 코스튬이다. 아프리카보다 덥다는 대한민국의 한여름 땡볕에서 버티려면 밀짚모자만큼 훌륭한 아이템도 없다. 밀짚모자 하나면 자외선 차단제도 손 선풍기도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다. 게다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이 누군가를 연상시켜 스스로도 썩 마음에 든다. 항상 아내의 작은 장점도 큰 강점으로 칭찬하는 남편과 달리 작은 단점도 커다란 결점으로 지적하는 아내에 따르면 머리 모양이 예쁘지 않아 어떤 모자도 어울리지 않지만, 밀짚모자만큼은 제법 봐줄 만하단다. 아내가 이 정도로 말한다면 극찬 중의 극찬이다. 그렇다고 일본 소년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그건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소박한 텃밭러는 비록 저 자신을 그렇게 상상하더라도 현실은 배 나온 아저씨일 뿐이니까.
솔직히 여름이 마냥 좋은 건만은 아니다. 큰 전투를 두 차례나 치러야 한다. 하나는 잡초이고, 다른 하나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모기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 평 텃밭에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은 여름이 찾아온 줄 귀신 같이 알아차리고는 조심스레 녹색 머리를 흙 위로 뾰족뾰족 내민다. 그것도 아주 촘촘하게. 쏟아지는 태양빛과 습기를 머금은 녀석들은 하루아침에 무시무시한 들풀로 자란다. 한 주만 건너뛰어도 오붓한 한 평 텃밭이 아마존 정글로 변해 버린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 무장한 소박한 텃밭러가 유사 과학인 '잡초자연발생설'을 신봉하는 음모론자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다.
모기는 또 얼마나 무서운가. 집안에는 모기 한 마리만 들어와도 비상사태가 선포된다. 향, 스프레이, 액체 모기향까지 3중으로 철통 경계한다. 하지만 텃밭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장해제되고 만다. 벌레퇴치용 스프레이를 흠뻑 뿌리고 텃밭에 오르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지만 인간은 여전히 모기로부터 끔찍한 위협을 받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어떤 날은 '모기빵 10단 콤보'로 두 다리가 온통 울긋불긋해지기도 했다. 부디 올해는 모기 천적 잠자리가 제 역할을 조금 더 충실히 해주기를. 잠자리야, 부탁해!
봄과 여름의 경계에서 한 평 텃밭에 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쌈 채소 중 유일하게 실패한 청겨자(애벌레의 집중포화를 받았다)를 눈물로 보내고 그 자리를 외대파(파의 한 종류인 여름 파형 품종으로 줄기파라고 도 부른다)로 채웠다. 대파 재배 경험이 부족한 게으른 텃밭러로서는 과감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미래를 기대하는 건 이기적인 심보니 설령 실패하더라도 사과나무, 아니 외대파를 심었다.
저녁 밥상에 첫 수확한 샐러리(celery)가 올랐다. 샐러리는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로 무려 1미터까지 자란다. 한 평 텃밭에서는 3~40센티미터까지 자라는데 알싸한 맛이 아이들은 절대 입에 대지 않지만, 아내와 내 입맛에는 그만이다. 버릴 것도 없다. 이파리는 쌈채소와 함께 먹고, 줄기는 고소한 마요네즈에 찍어 먹으면 맛이 기가 막힌다. 눈 건강에 좋은 비타민A와 면역력을 증진시키는 비타민 B1, B2, C 등이 다량 함유되어있다. 식이섬유 함유량이 많고 먹으면 포만감을 줘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조금 일찍 찾아온 노안과 갈수록 나오는 배로 힘들어 하는 요즘, 샐러리는 그 자체로 완벽한 음식이 아닐 수 없다.
기후변화로 올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우리라는 전망이다. 식량 문제, 유가 문제, 미국 금리 문제, 한중미 관계 등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국내 이슈는 생각하기도 싫으니까 패스.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흐르고 방금 갈아입은 옷이 금방 흥건해져도 한여름 한 평 텃밭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올해도 이글거리는 땡볕에 오이랑 호박은 대풍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물색없이 빌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