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여름은 오이의 계절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여름 2장

by 조이홍

소박한 한 평 텃밭러에게 여름은 짙은 녹색과 하늘하늘한 백색 투피스를 입은 까슬까슬한 오이의 계절이다. 미처 다 먹을 새도 없이 주렁주렁 달린 오이를 수확하느라 땀을 비 오듯 쏟는다. 5월 중순까지 무릎도 채 오지 않던 작디작은 꼬마 모종이 어느새 은퇴한 농구 선수만큼 큰 키를 자랑한다. 불과 한 달 남짓 시간 동안 대지의 신이 뿌리에 훅훅 생명의 바람이라도 불어넣었나 보다. 사실 5월 햇살도 뜨겁기로는 만만치 않은데 고맘때 성장 속도는 그렇게 더딜 수 없었다. 이건 마치 첫돌이 다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걷지 못하는 아이를 보는 것 마냥 조마조마했다. 텃밭에 갈 때마다 '올해 오이 농사는 실패한 걸까?'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온몸을 휘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이는 한 평 텃밭의 '시그니처 채소'이다. 숱하게 많은 채소가 실패를 거듭했지만, 오이는 지난 10년 동안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텃밭 4대 천왕도 오이만큼은 소박한 텃밭러를 따라오지 못했다. 탐스럽게 달린 오이 앞에서 "아니 애 아빠가 오이 농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지어요?"라며 칭찬을 늘어놓을 때마다 우쭐해지는 어깨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여태껏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오이는 언제나 대풍이 들어야 하고, 올해도 반드시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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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오이 모종 심은 날 / 5월 15일 여전히 꼬마꼬마한 오이 / 6월 4일 제법 자란 오이

5월 내내 고만고만한 키로 한 평 텃밭에 웅크리고 있던 오이는 6월이 되자 '탕' 하는 신호음과 함께 총알처럼 튀어나가는 단거리 주자처럼 마침내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갔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성장은 멈출 줄 몰랐다. 무수한 세월 동안 바위 위로 떨어진 물방울들이 작은 흠집조차 내지 못했지만, 어느 한 방울부터는 아주 조그만 홈을 만든다. 그 이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평범한 물방울이 아니라 바위에 구멍을 뚫는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된다. 오이에게 있어 6월의 햇살이 그렇다. (인간이 지각하기에) 5월과 그리 다르지 않을 햇살이 오이에게는 성장의 트리거(방아쇠)가 된다. 결국 다른 무수한 걱정들처럼 오이를 향한 불안감이나 조바심은 모두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 내 마음속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췄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럼 이제 남은 건 오이를 즐기는 일뿐.

6월20일 (11).jpg <6월 20일, 너무 자란 오이는 이제 손에 닿지도 않는다>

생오이를 흐르는 물에 씻고 까슬한 부분을 감자칼로 쓱쓱 제거해 먹기 좋게 잘라주면 그대로 훌륭한 반찬이 된다. 물론 맛있는 고추장(또는 양념장)이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좋다. 오이과 식물(오이, 참외)은 입에도 대지 않는 둘째 아이는 식탁에 생오이만 올라와도 기겁하고 접시를 밀어내지만 나와 첫째 아이는 생오이를 무척 좋아한다. 가끔 간식으로 그냥 먹기도 하지만, 역시 완전식품인 감자, 고구마와 함께 다이어트할 때 최고의 콤비이다. 오이는 칼로리가 낮고 지방 함량은 적으며 수분이 풍부해 다이어트 시 부족한 수분을 보충해 준다. 오이 소주는 또 어떤가? 소주 한 잔 못 마시던 대학 새내기 시절 내 곁을 지켜준 건 팔 할이 오이 소주였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생오이지만 안타깝게 '오이로 만든 음식 Top 3'에는 그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음식이 그 자리를 꿰찬 걸까?


역시 오이로 만든 음식의 최고봉은 오이소박이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던 내게 오이소박이는 언제나 맵지 않은, 게다가 사각사각 소리까지 맛있는 김치였다. 그토록 입 짧은 나도 오이소박이 하나면 다른 반찬 없이도 밥 한 공기 뚝딱 해치웠다. 적당히 매콤한 양념에 버무린 부추와 당근을 오이 사이사이에 쏙쏙 집어넣은 오이소박이는 여름철 별미였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무림 지존 오이소박이를 위협한 신흥 강자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장모님 표 오이지다. 장모님 요리 솜씨는 삼척에 사는 어린아이들(삼척동자)도 다 알만큼 소문났지만, 이 독특한 오이지는 어떤 음식과도 비교 불가능하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밥뿐만 아니라 국수, 라면, 심지어 고기와도 궁합이 잘 맞았다. 얼마나 맛있으면 기업가 정신(사업 마인드)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내가 '이 오이지로 사업 한 번 해 볼까?'라는 생각을 다 했을까! 이 오이지와 쌍벽을 이루는 음식이 바로 오이냉국이다. 상큼 시큼한 오이가 담뿍 담긴 시원한 국물에 식은 밥 한 덩이 말아먹어도 황제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오이 하나로도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이렇게 많다. 모두 소박하지만 건강한 음식들이다. 기원전 3000년 경 인도 서북부 히말라야 산록 지대에 살았던 원주민들에게 감사했다. 뜬금없이? 바로 이들이 야생 오이를 최초로 작물화에 성공해 지금의 오이를 만들어 준 장본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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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 오이는 특별한 채소이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네 명이 쪼르륵 누워 오이 마사지를 즐기곤 했다(요즘은 아이들이 잘 안 하려고 하지만). 물론 신선한 오이는 입으로 들어가기 바쁘기에 때를 놓친 오이를 피부에 양보한다. 냉장고에 오래 보관해 둔 덕분에 얇게 저민 오이를 얼굴에 갖다 대면 "아, 차가워!"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시원한 오이를 잔뜩 얼굴에 붙이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꿈꾸듯 잠에 취한다. 한 평 텃밭에서 수확한 오이로 그럭저럭 에어컨 없는 무더운 여름을 버텨냈다. 요즘은? 세상이 변했고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더우니 에어컨 좀 틀어달라는 아이들에게 찬 물에 샤워하고 시원하게 오이 마사지할까 물어보면 '아빠, 어느 별에서 왔어요?' 하는 생뚱한 표정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그냥 에어컨이나 틀어 주세요."라는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냉장고에 자꾸만 묵은 오이가 쌓여 간다. 다행이다. 내 얼굴이 아내보다 두 배는 크니까. 오늘 밤에는 오랜만에 아내랑 둘이 오이 마사지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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