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 봄 3장
겨우내 꽁꽁 얼었던 흙을 갈아엎고 잔돌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인 끝에 한 평 텃밭에도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 게다가 천연 계분과 쑥쑥(부엽토와 배양토 등을 혼합한 분갈이용 흙)이로 지친 땅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니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은 만석꾼의 논밭도 부럽지가 않았다. 오후가 되면 따사로운 햇살에 까무룩 단잠에 빠지는 완연한 봄이 왔다. 기나긴 겨울이 비로소 끝난 것일까? 천만의 말씀. 봄기운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던 동장군이 염치없이 몽니를 부렸다. 소복하게 쌓이는 함박눈까지 내리면서 봄을 샘낸다. 3월 중순에 나리는 눈은 하얀 빛깔과 달리 부지런한 텃밭러의 마음을 새까맣게 타들어 가게 한다. 일찍 심어놓은 대파며 시금치며 상추가 얼어 죽을까 봐서이다. 이 순간 텃밭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날씨도 인생과 같아서 늘 의도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 법이다. 그저 작고 여린 초록이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믿고 응원하는 수밖에. 한 평 텃밭을 가꾸는 데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종잡을 수 없는 날씨'라고 대답하겠다. 날씨는 삐딱선 타는 걸 즐기는 묘한 성향이 있다. 언제나 사람의 소망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쨍쨍한 해 좀 보고프다 싶으면 추적추적 비를 내리고, 시원하게 비라도 쏟아지면 좋겠다 싶으면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이 거드름을 피웠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텃밭러가 감에만 의지할 수 없었다. 때로는 과학적 사고와 데이터가 필요했다. 통계적으로 꽃샘추위 없는 3월은 단 한 번도 없았다. 일찍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어 노심초사하느니 조금 늦더라도 확실한 봄 햇살을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더욱이 천연 비료(계분)와 부엽토 등을 섞은 흙에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려면 2주 정도 기다려야 효과가 좋았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물러가길 기다리며 소박한 한 평 텃밭러는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곡을 듣는다. 한가로운 주말 오후다.
바람 끝에서 따뜻한 남풍이 느껴졌다. 3월의 마지막 주말, 드디어 움직일 채비를 한다. 한 평 텃밭에 파종, 즉 씨를 뿌릴 시간이다. 모종삽, 원예 가위, 목장갑, 그리고 식물원에서 산 씨앗들을 넣어둔 에코백을 챙긴다. 2주 동안 부지런히 모아둔 달걀 껍데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A4 이면지에 그려둔 밑그림은 마치 보물지도 인양 소중히 안주머니에 넣는다. 준비 완료! 모처럼 아이들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빠 텃밭에 씨 뿌리러 가는데 같이 갈 사람?” 아빠 말이 들리지 않는 양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텃밭에 같이 갈 사람 없어?” 그제야 둘째 아이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뭐 해 줄 건데?” 아니, 텃밭 가는 데 해 주기는 뭘 해 줘? 같이 가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더 이상 텃밭에 서로 가겠다던 귀염둥이들이 아니었다. 예상했던 결과라 딱히 마음 아프지 않았다. 마스크를 쓰고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끼고 홀로 텃밭에 이르는 ‘침묵의 계단’을 오른다. 봄 햇살에 몸은 따뜻해도 왠지 마음 한 편은 여전히 겨울이다.
텃밭에 도착하니 동네 뒷산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개나리며 진달래가 꽃망울을 피우기 전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도 꽃샘추위마저 이겨낸 이웃 텃밭의 대파며 시금치와 상추들이 초록의 생기를 군데군데 펼쳐 놓은 덕분에 삭막하지만은 않았다. 지난여름에 심어두었다는 마늘도 제법 자라 봄의 풍경을 더한다. 텃밭 4대 천왕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한 평 텃밭 앞에 우뚝 섰다. 들고 온 짐을 내려놓고 먼저 달걀 껍데기부터 텃밭에 잘 흩뿌려준다. 잘게 부순 달걀 껍데기는 식물에게 꼭 필요한 영양분인 질소를 흡수하고 뿌리를 강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원래는 날달걀을 사용하고 안에 남은 하얀 막을 제거해줘야 한다는데 꼼꼼하게 챙기지 못했다. 너무 게으름을 피웠다. 달걀 껍데기를 골고루 뿌려준 후 식물원에서 사 온 씨앗들을 꺼냈다. 모둠 상추, 청겨자, 청경채, 대파 이렇게 네 종류였다. 아뿔싸, 작은 문제가 생겼다. 봉투 뒷면에 상추, 청겨자, 청경채는 중부 지방 노지 기준으로 파종 시기가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라 상관없었는데, 대파는 4월 중순부터 파종할 수 있다고 표기되어 있었다. 대파 씨를 심기 위해 별도 화분을 마련해 놓고 기름진 흙도 준비해 두었는데 아직 2~3주는 더 기다려야 했다. 1차 갈등이 시작되었다. 합리적 자아와 욕심에 눈먼 자아가 충돌했다. 대파는 2월에도 심을 수 있는데 이 품종만 4월에 심는 게 말이 되냐는 욕심쟁이 자아와 설명서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해야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이성적인 자아가 서로 치고받고 싸웠다. 지난해 잦은 실패도 설명서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심어버린 데 있는 듯했다. 설명서대로 대파는 4월 중순 이후에 심기로 했다.
딱히 보면서 확인할 것도 없는데 반듯하게 접은 보물지도, 아니 텃밭 밑그림을 안주머니에서 꺼내 조심스레 펼쳤다. 왼쪽 첫째 줄에는 쌈 채소를 심기로 했다. 모둠 상추 봉투 윗부분을 원예 가위로 싹둑 잘라 개봉했다. 손바닥 위에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상추 씨앗들을 올려놓으니 색깔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파란색, 연녹색, 자주색, 갈색, 흰색 씨앗들이 어찌나 작고 예쁘던지 흙 속에 묻어 두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포장지에는 ‘축면계통 상추, 치마계통 상추, 샐러드계통 상추, 오크계 상추 등 4~6 품종이 혼합 포장되어 있다’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어떤 씨앗이 어떤 계통의 상추인지 잘 모르겠으나 사진을 보니 우리가 흔히 먹는 상추 모습 그대로였다. 이제 아이들도 제법 상추를 잘 먹으니 밑그림대로 첫째 줄에는 상추를 심기로 했다. 상추는 싹이 틀 때 햇빛이 필요한 ‘볕받이씨’이므로 씨앗을 뿌린 후 흙을 얇게 덮어주어야 한다. 모종삽으로 텃밭 길이만큼 직선을 긋고 그 틈에 골고루 씨앗을 뿌려주면 끝이다. 상추 씨는 워낙 작고 가벼워 씨앗 하나하나 골라 심는 게 불가능하다. 흩뿌린 후 싹이 트면 솎아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 덕에 봄철 별미 새싹 비빔밥도 푸짐하게 한 끼 해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그런데 첫 줄에 심어야 할 청겨자를 심지 못했으니 계획이 살짝 틀어져 버렸다. 청겨자는 알싸한 맛이 일품인 쌈 채소라 포기할 수 없어 둘째 줄에 심기로 한다. 청겨자 씨앗도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영롱한 색깔이 무척이나 고왔다. 인간이 아무리 화려한 색상을 만들어내도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을 터였다. 둘째 줄에는 청겨자와 함께 청경채를 심었다. 청경채 씨앗은 고동색에 가까웠는데 크기가 균일하지 않고 조금씩 달랐다. 상추 씨앗과 다 자란 상추, 청겨자 씨앗과 다 자란 청겨자는 어느 정도 연상할 수 있지만, 청경채 씨앗과 청경채는 왠지 연상되지 않았다. 문득 궁금했다. 씨앗들은 자신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랄지 미리 알고 있을까? 만약 모른다면 청경채는 씨앗계의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닐까 싶었다. 미운 오리가 사실은 오리가 아니라 우아한 백조였듯이 볼품없이 생긴 청경채 씨앗도 다 자라고 나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청겨자는 20cm 간격으로 뿌려주고 청경채 역시 일정 간격 이상으로 뿌려주어야 하지만 상추와 마찬가지로 흩뿌리기로 한 후 솎아주기로 한다. 두툼한 손가락으로는 도저히 작은 녀석들을 하나씩 골라낼 수 없었다. 게다가 마음속에는 이미 새싹 비빔밥이 단단히 자리 잡지 않았던가.
계획했던 씨앗 뿌리기를 무사히 끝마쳤다. 원래 계획과 다소 틀어지긴 했지만 현장에서는 융통성이 필요한 법이다. 사용했던 씨앗들을 다시 밀봉해 집어넣으려는데 에코백 안 낡은 비닐봉지에서 지난해 뿌리고 남았던 로켓 샐러드(루콜라)를 발견했다. 토마토만 넣어도 맛 좋은 샐러드로 변신하는 루콜라는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채소다. 내년에는 루콜라를 좀 많이 심으면 좋겠다는 아내 말이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부리나케 밑그림을 다시 펼쳤다. 아무리 공간을 나누고 쪼개도 루콜라 심을 자리가 없었다. 루콜라를 심으려면 다른 채소를 포기해야 했다. 오이와 호박은 한 평 텃밭의 간판 채소라고 불릴 정도로 확고한 지위를 누리고 있어 감히 손댈 수 없었다. 그렇다면 토마토, 고추, 셀러리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만 했다. 모종을 조금 바짝 붙여서 심고 자투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도 있긴 했다. 둘 다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때 대파를 심기로 했던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4월 중순에 파종하는 대파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조금 늦어도 상관없었다. 몇 주 그냥 두느니 화분에 루콜라를 심기로 했다. 기막힌 임기응변에 스스로를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엄청나게 작은 루콜라 씨앗은 꼭 볶은 커피 원두를 닮았다. 왠지 커피 향이 날 것 같았다. 화분에 세로줄 4개를 긋고 촘촘하게 루콜라를 심었다. 루콜라도 상추처럼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 순한 아이라 6월까지 키우기로 했다. 의외의 복병을 만났지만 의연하게 대처한 덕분에 한 평 텃밭 씨 뿌리기가 마침내 끝났다.
물뿌리개에 반쯤 물을 담아 오늘 심은 씨앗들을 촉촉하게 적셔주었다. 빠르면 1주일 늦어도 2주일 안에는 싹을 틔울 것이다. 가장 부지런한 텃밭러조차 싹트는 순간은 보지 못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작은 씨앗이 자신의 세상을 꿰뚫고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무거운 흙을 관통해 생명을 시작하는 위대한 순간은 아직 누구에게도 포착되지 않았다. 어쩌면 봄이 오는 소리란 땅속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씨앗이 자기 자신과 흙을 뚫는 생명의 소리 말이다. 요맘때면 어김없이 카렐 차페크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자연에 끝이란 없는 법. 감히 말하건대, 자연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잠에 든다는 표현도 사실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 생명이란 영원한 것. 섣불리 끝을 가늠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보라.” 하루빨리 만나고픈 모종들이 나오려면 아직 2~3주나 남았다. 흙 일구기에서 시작한 한 평 텃밭의 봄은 파릇파릇한 모종들이 채워지며 봄의 절정에 이른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다음 주 날씨를 확인했다. 다행히 하루 비 소식이 있고 나머지는 볕이 좋을 예정이란다. 이대로라면 다음 주쯤이면 오늘 심은 씨앗들에게서 새싹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다음 주에는 이른 새벽녘에 텃밭에 나와 볼 참이다. 혹시 새싹이 흙을 뚫고 나오는 순간을 인류 최초로 목격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