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오후

천양희 시인 <새벽에 생각하다>와 이성복 시인 <무한화서>

by 조이홍
천양희시집.jpg

<생각이 달라졌다>


웃음과 울음이 같은 音이란 걸 어둠과 빛이

다른 色이 아니란 걸 알고 난 뒤

내 音色이 달라졌다


빛이란 이따금 어둠을 지불해야 쐴 수 있다는 생각


웃음의 절정이 울음이란 걸 어둠의 맨 끝이

빛이란 걸 알고 난 뒤

내 독창이 달라졌다


웃음이란 이따금 울음을 지불해야 터질 수 있다는 생각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처럼

나는 골똘해졌네


어둠이 얼마나 첩첩인지 빛이 얼마나

겹겹인지 웃음이 얼마나 겹겹인지 울음이

얼마나 첩첩인지 모든 그림자인지


나는 그림자를 좋아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졌다.




<복권 한 장>


마들역 왼편에

복권만 파는 명당 복권집이 있다

1등 당첨이 열세 번이라고

자랑처럼 나붙은 깃발 아래

사람들이 긴 줄을 잇고 있다

끈질긴 끈 같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본주의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숲속에 들어가 산 스콧 니어링을 생각한다

그가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그냥 얻어진 횡재니 양심에 찔린다며

복권을 휴지처럼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 대목에 가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권 한 장 찢었을 뿐인데

내가 왜 이렇게 찢어지는 것일까

만일 그 복권이 내 것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이 무슨 굴러온 복이냐며

좋아라 길길이 뛰었을 것이다

숲속에 들어가 산 니어링과

수락산 밑에 사는 내가 분명 다른 것은

그는 복권을 버렸지만 나는

자손심을 버렸다는 것이다


무한화서.jpg



편성준 작가님의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에 소개된 여러 권의 책 중에 천양희 시인의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와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를 함께 읽고 있다. 1942년 생인 천양희 시인은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적인 말맛(물론 요즘 세대의 언어와는 결이 다르지만)과 삶의 깊이를 언어에 채워 넣었다. 이 가을에 감상하기에 딱 좋은 시라 아껴가며 읽는 중이다. 시집 말미에 김명인 시인이 그를 두고 "시어의 반복과 중첩, 동음이의어나 유사어의 활용, 음상(音相)의 병치 등을 자원으로, 삶의 근거에 다가서려는 시선이 오롯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아주 조금 이해되었다. 이성복 시인의 <무한화서>는 서두에 소개된 바와 같이 '2002년에서 2015년까지 대학원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시(글쓰기)에 대한 아포리즘이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에 다 모여 있었다. 이 책에 정리된 문구를 절반만 이해해도 당신은 이미 시인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게 시'라고 하는데 이 문장을 수십 번 다시 읽어도 내 뇌가 작동하지 않았다. 수백 개의 아포리즘 중에 고개를 끄덕인 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니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 몇 가지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를 소개해 볼까 한다. 이는 천양희 시인의 좋은 시들 중에 굳이 '복권 한 장'을 소개하는지와 관련이 있다.


"뭐든지 잘 들여다보세요. 입가에 말라붙은 침 자국, 주방 환풍기에 달라붙은 기름때, 변기 앞에 떨어진 오줌 방울...... 세상 모든 의미 없는 것들에게 의미를 되찾아주는 시인은 신이 버려둔 일을 대신하는 존재예요."


세상 모든 곳에 임할 수 없어서 신이 '어머니'를 창조하신 줄은 알았지만, 당신의 부재를 대신해 '시인'까지 두셨을 줄이야. 전지전능하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꼼꼼하기까지 하실 줄은 몰랐다. 시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겠다. 가장 낮은 곳까지 임할 수 있어야 시인이 되는 것이리라.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만약 신이 없다면 이 넓은 우주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다. 시인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시 한 편 읽기 좋은 가을 오후다. 이런 날에는 사람들 손에 스마트폰 말고 작은 시집 한 권 들려 있으면 좋겠다.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복권을 사볼까 한다. 1등에 당첨되면 나는 스콧 니어링이 될지 아니면 천양희 시인이 될지 나로서도 무척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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