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에게 배추를 양보했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가을 4장

by 조이홍

"지난주에도 배고픈 고라니가 몇몇 텃밭을 습격했나 보다. 볕 좋은 오후 텃밭의 공기가 농밀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무와 배추는 껑충 자라고 이웃들의 울타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궁색한 한 평 텃밭을 바라보다 문득 앙큼한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고라니가 이웃 텃밭에 가지 말고 차라리 우리 텃밭에 와서, 차린 건 별로 없지만, 죄다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싶었다. 가슴이 조금 쓰리겠지만, 고라니에게도 좋고 이웃에게도 좋고, 나도 나대로 글 쓸 소재가 생기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을까? D-day(수확하는 날)까지 어떤 식으로라도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 아니던가!" (가을 3장, '가을 농사는 망했다' 中에서)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 듣고 계셨나요? 거기 계셨나요…. 아님, 고라니가 브런치에 다녀갔나?


주말 아침, 새벽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오전 8시를 넘기면서 바깥 풍경이 퀀텀 디스플레이 4K처럼 선명해졌다. 창문으로 거들먹거리며 들어온 가을 햇살이 금방 거실에 똬리를 틀었다. 비가 온다더니 아마도 오보였나 보다. 날이 좋으니 거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잠이 덜 깬 둘째 아이를 재촉해 한 평 텃밭에 오르기로 했다. 그렇다, 오늘이 바로 D-day, 배추와 무를 수확하는 날이다. 원래는 지난 주말에 수확하기로 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한 주 미루게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해도 한낮 기온은 제법 따뜻해 한 주 정도 더 두어도 상관없을 성싶었다. 게다가 여리여리한 배추와 무가 한 주 동안 따뜻한 햇볕을 받아 한 뼘은 자랄지도 모를 일이니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겠다 싶었다. 3주 동안 한 평 텃밭이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을 농사는 망했다'라고 선언했지만, 기대하지 않음으로 내심 더 기대했다. 그간의 가을 농사 이력을 따져보니 그래도 기본은 하겠지 싶었다. 다음 주로 예정된 처갓집 김장에 사위가 손수 키운 속이 꽉 찬 배추와 아내 다리만큼은 아니더라도 튼튼한 무 네댓 개를 턱 하니 내놓으면 장모님께 점수 딸 절호의 기회였다. 텃밭에 오르는 길에 단풍이 절정이었다. 아이 성장 앨범과 내년 달력에 사용할 사진을 몇 장 찍고 서둘러 텃밭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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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이 갓!"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나조차도 그 탄성이 기뻐서 나왔는지, 놀라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분이 다녀가신 게 분명했다. 주님, 아니 고라니님 말이다. 여섯 포기 배추 중에 다섯 포기를 제대로 먹어치웠다. 인성 교육을 받은 고라니였던지 다행히 한 포기는 건들지도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한 포기가 여섯 포기 배추 중에 가장 실했다. 어쩌면 다음 방문을 위해 남겨 놓았을지도 몰랐다. 왜 우리도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나중에 먹지 않던가. 아니면 한 포기쯤은 인간에게 양보했을지도…. 놀란 토끼 눈을 한 둘째 아이가 "어떡해, 아빠?"를 외쳤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남은 배추도 고라니에게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배가 고픈데 이웃 텃밭의 울타리는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 침입할 수 없으니 초라한 한 평 텃밭을 골랐을 터였다. 부실한 배추도 야무지게 갉아먹은 걸 보면 주린 배를 다 채우지 못한 게 분명했다. 마침 텃밭 4대 천왕 중 우두머리 격인 반장님이 안타까워하며 "그러게 울타리를 쳐야지. 저 집도 울타리가 없어서 고라니가 죄다 먹어치웠어." 하셨다. "저희는 김장하는 것도 아닌데요, 뭐. 괜찮습니다."라고 쿨하게 말했지만, 사실 아까운 마음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래도 울타리는 치지 않으리라 둘째 아이와 약속했다. 그럼 앞으로도 내내 고라니의 단골집이 될 게 분명했지만, 우리 텃밭마저 울타리를 두르면 그들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다. 고라니들이 아파트 단지까지 내려와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고라니는 우리나라에는 개체수가 많아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유해조수'로 지정됐지만, 전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종(세계자연보전연맹 적색목록 취약종) 동물이다. 개체수가 늘어난 것도 고라니 잘못만은 아니다. 천적인 호랑이, 표범, 늑대 등이 멸종해 종의 다양성이 깨져버린 탓이다. 결국 책임은 다시 우리 인간에게 돌아오니 배추를 훔쳐 먹은 고라니를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그러니 한 평 텃밭은 고라니 단골집으로 남겨둘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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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야무지게도 갉아먹었다. 무지 배고팠나 보다>
11월12일 (24).jpg <배추벌레가 조금 갉아먹었지만, 유일하게 멀쩡한 최후의 배추, 과연 녀석의 운명은?>

배추를 포기하자 우리 눈은 자연스럽게 무를 향했다. 한숨부터 나왔다. 무는 정말 폭망했다. 가장 잘 자란 무가 아이 주먹 절반만큼도 되지 않았다. "채수용 무를 구해오라"는 아내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한두 주 더 둔다고 자랄 것 같지도 않고, 언제 혹한이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을 11월이었다. 죄다 뽑아 그나마 채수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를 챙기고 나머지는 고라니 후식으로 남겨 놓기로 했다. 둘째 아이가 뽑은 무를 그 자리에서 무청을 정리했다. 지난해에는 제법 잘 자라 무청으로 시래기 만들기도 시도했는데, 비록 실패했지만, 올해는 그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고라니도 입맛이 까다로워, 반장님 말에 의하면 배추도 속이 꽌 찬 녀석들만 골라 먹는다고 무슨 아이스크림 가게도 아닌데, 무청을 먹을까 싶었다. 물장난을 하고 싶은지 둘째 아이가 무를 씻어 오겠다고 했다. 아이가 무를 씻는 사이 세 계절 동안 고생한 텃밭을 정리했다. 기민한 이웃 텃밭러들은 벌써 겨울 농사를 준비했지만, 한 평 텃밭은 기나긴 겨울잠에 들기로 했다. 아마 아이와 나도 한동안은 한 평 텃밭을 찾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한 평 텃밭이 적막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마지막 배추 한 포기와 무청을 먹으러 가끔 고리니가 놀러 올 테니 말이다. 한 평 텃밭도 고리니도 그렇게 각자의 겨울을 살아내는 것이 조화로운 자연의 법칙 아니겠는가. 한 평 텃밭에 더 이상 농작물은 자라지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계절 하나가 남아 있으니 말이다.

11월12일 (35).jpg <꽤 작아 보이는 무지만 사실 생각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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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만하고, 나무 만하다. 사실 엄청나게 큰 무다. T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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