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가을 3장
10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두툼한 외투를 꺼내 입은 걸 보면 쌀쌀하다는 말로는 그 '싸늘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최저기온이 영하 2.4℃까지 내려간 설악산 대청봉 일대에 10월 10일, 절대자님 탄생일에 맞춰 첫눈이 내렸다. 전날 밤부터 내린 눈의 양은 1cm 미만이었지만, 지난해 내린 첫눈보다 9일이나 빨랐고, 2020년보다는 무려 24일이나 일찍 관측되었다. 단풍이 절정에 달하는 어제, 오늘보다도 열흘이나 빨리 찾아온 첫눈이라니 지구의 온도계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구나 의구심이 드는 게 나만은 아닐 터였다. 더 빨리 쌀쌀해진 가을은 우리 집에도 소소한 변화를 일으켰다. 밤마다 '핫팩'을 만들어 대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여름에 최적화된 신체를 가진 아내는 10월 달력을 넘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핫팩을 주문했다. "오빠, 핫팩 해줄꺼죵?" 귀여운 척하며 꼭 두 개씩 요청한다. 더운 건 못 참는 둘째 아이도 잠자리가 서늘한지 '핫팩 해주세요!'를 외쳤다. 자연스레 첫째 아이도 "저도요!" 한다. 그렇다고 10월 중순부터 보일러를 가동할 수도 없으니 밤마다 커피 포트에 물을 가득 채워 핫팩을 만들었다. 사실 요맘때 따뜻한 핫팩 하나 안고 자면 그렇게 잠이 잘 올 수 없다. 왕의 침상이 부럽지 않다. 따뜻한 핫팩이 남편보다 백 배 더 낫다고 무덤덤한 얼굴로 말하는 아내에게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했다. 핫팩을 가슴에 품고 서로 등 돌린 채로 자는 게 익숙하니 말이다. 결혼 20년 차 부부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도,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가족이니까!
겨울이 한 걸음 바짝 곁으로 다가온 한 평 텃밭은 올해 마지막 수확을 남겨 두고 있다. 9월 초 모종으로 심은 배추와 씨앗으로 뿌린 무가 더디게 흐르는 가을의 시간과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하지만 한 평 텃밭으로 향하는 계단을 일주일 만에 오르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유난히 풍성했던 봄과 여름을 관통하면서 수확물을 향한 욕심도 시기심도 모두 내려놓았다 여겼는데, 유독 한 평 텃밭에서만 잘 자라지 않는 배추와 무를 이웃의 그것들과 비교하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이었다. 우리 텃밭 배추는 배춧잎도 몇 장 없는데 그나마도 죄다 애벌레와 달팽이의 지나친 사랑을 받았고, 새끼손가락만 한 무는 이웃집 열무보다 훨씬 작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뾰족해졌다. "도대체 한 평 텃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아니 일어나지 않은 거야?" 모두에게 공평한 자연법칙이 이 공간만 외면한 듯했다.
농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텃밭 4대 천왕'의 배추와 무는 그렇게 탐스럽게 자랄 수 없었다. 당장 오늘 수확해도 될 만큼 성숙했다. 그런 녀석들에 비하면 우리 배추와 무는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유아 수준이었다. 늦어도 11월 첫째 주에는 무와 배추를 수확해야 하니 이제 한 평 텃밭에 남은 시간은 두 주밖에 되지 않았다. 두 주만에 어린 배추와 무가 성숙하게 자랄 확률은 제로에 수렴했다. 쉽게 말하면, 올해 가을 농사는 망했다는 이야기다. 여름 끝자락에 모셔온 토선생(지렁이)들이 단체로 단풍놀이라도 간 걸까? 아니면 여름 수확을 끝내고 한 평 텃밭에 허락해 준 일주일 휴지기가 너무 짧았던 걸까? 압축 계분이 부족했나? 우연이 운명처럼 얽혀 이 모든 게 동시에 작동했는지도 몰랐다. 괜스레 풀 죽어 있는 우리 배추와 무에게 미안한 마음만 더 커졌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좀 더 꼼꼼하게 돌봐줬더라면 녀석들이 지금보다는 더 잘 자라지 않았을까? 눈치 없이 무보다 더 잘 자란 잡초에게 연신 화풀이를 했다.
안타까운 텃밭 소식을 전했더니 별 것 아니라는 듯 쿨하게 말하는 아내. "어차피 우리가 김장 담그는 것도 아니잖아. 무는 채수 낼 때 쓰려는 거니까 작아도 상관없어. 배추는 뭐 늘 그랬잖아." 아내의 담담한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파고들었다. "올해는 채수 낼 정도도 안될 것 같은데…."라고 고백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남은 2주 동안 작은 기적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니 말이다. 어차피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니 아내에게 손써두길 잘했다 싶다.
지난주에도 배고픈 고라니가 몇몇 농장을 습격했나 보다. 볕 좋은 오후 텃밭의 공기가 농밀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와 배추가 껑충 자라고 덩달아 이웃 텃밭의 펜스도 높아만 갔다. 허름한 한 평 텃밭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라니가 이웃 텃밭에 가지 말고 차라리 우리 텃밭에 와서, 먹을 건 별로 없지만, 죄다 먹어치웠으면 좋겠다, 뭐 이런 상상 말이다. 그럼 마음이 조금 아프긴 해도, 고라니에게도 좋고 이웃도 좋고, 나도 나대로 글 쓸 소재가 생기니 이 보더 더 좋을 순 없지 않을까? 남은 두 주 동안 어떤 식으로라도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 가을은 기적이 일어나기에 좋은 계절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