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의 가을은 천천히 흘러간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가을 2장

by 조이홍

이름도 어려운 초강력 태풍 '힌남로'가 지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세력이 만만치 않은 태풍 '난마돌'이 한반도를 비껴갔다. 일본 규슈를 강타한 이 태풍의 영향으로 제주도와 경상권 해안, 강원 영동에는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비껴간 태풍의 세력이 이 정도니 '가을 태풍' 무섭다는 말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변화로 해수면 기온이 상승해 태풍의 빈도는 줄어들었지만 강도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발생 위치도 계속 북상해 우리나라와 더욱 가까워지고 이동 속도도 느려 대기 중에 머금은 수증기를 충분히 빨아들인 후 엄청난 강우로 토해낸다. 2020년 기상청이 가장 강력한 태풍 단계인 '초강력 등급'을 신설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머지않아 '태풍 매미'의 온순함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이제껏 온화했던 지구의 기후는 더 이상 친절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80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로 ‘반지하 일가족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 8월 폭우로 우리 동네에도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일어났다. 인명 피해도 있었다. 도로가 유실되고 버스 정류장과 보도블록도 붕괴되었다. 인근 전원주택에 사는 한 지인은 빗물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웃 주민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하룻밤 내리는 비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요 며칠 사이 깨닫고 또 깨달았다. 연이어 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하고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면서 붕괴된 인도는 느슨해진 '출입금지' 라인처럼 외롭게 방치된 채 오늘도 흉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마시는 막걸리 한 잔과 금방 구운 파전의 낭만은 이미 오래전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짚신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처럼 후드득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부디 이번에는 큰 피해 없기를.' 마음속으로 빌게 된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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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태풍 힌남로가 지나간 후 둘째 아이가 텃밭이 궁금하다며 웬일로 함께 올라가자고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일손이 필요해 같이 가자고 졸라도 온갖 핑계를 대며 도망치던 아이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비가 많이 내려 도로도 무너졌는데 며칠 전 자기가 직접 심은 배추 모종이 괜찮은지 궁금하단다. 모름지기 소년이라면 응당 이래야 하는 법인데, 그간의 행적이 고약해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부터 들었다. 아, 무너진 부자관계여, 잃어버린 신뢰여! 바람이 선선해지고 해도 짧아지면서 가을 텃밭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잡초도 식물들도 여름처럼 무럭무럭 자라지 않으니 갈수록 발길이 뜸해졌다. 게다가 잦은 비로 물 주러 갈 일도 없으니 소박한 텃밭러야말로 한 평 텃밭이 무사 태평한지 궁금하던 터였다. 제법 손마디가 굵어진 아이의 손을 잡고 모처럼 사이좋게 텃밭에 올랐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오래간만에 내리쬐는 햇볕이 싫지 않았다.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 평 텃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월 폭우를 견뎌낸 텃밭은 무시무시한 슈퍼 태풍도 보란 듯이 이겨냈다. 아이가 "어, 텃밭은 멀쩡하네. 다행이다." 혼잣말할 때 얼른 끼어들었다. "당연하지. 텃밭 주변은 온통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잖아. 온갖 식물들도 많고. 아무리 비가 많이 내려도 이곳만큼은 어쩌지 못할 걸!" 하며 나무의 순기능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그러자 아이는 다 아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얼굴로 "이번에는 나무에 관한 책 읽었어? 다행이네, 이제 채식하자는 말은 안 해서." 배배 꼬인 말로 아빠의 심장을 저격하고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쿨하게 집으로 내려갔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큰 게냐? 모음 'ㅐ'와 'ㅔ'를 매번 헷갈려 "그런대(데)"와 "이재(제)'로 쓰기를 밥 먹듯 하더니 어휘력도 몰라 보게 늘었다. 늘 붙어 있어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한 뼘이나 자란 아이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아이처럼 텃밭도 자세히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난 2주 동안 배추 잎사귀는 조금 더 커졌고, 무도 드문드문 싹을 틔웠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흐르지는 않았다. 다소 늦을 뿐 분명히 새 생명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물론 시간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은 쪽파도 있었다. 2주 전에 비해 두 배는 더 자라 삐죽삐죽 내민 머리가 어느새 장발이 되었다. 이 정도면 올 겨울 김장에 제 몫을 단단히 해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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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춧잎 위를 느릿느릿 기어하는 달팽이처럼 한 평 텃밭의 시간도 더디게 흘렀다. 하지만 결국 씨앗은 애초에 품었던,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위대한 여정을 따라 자기만의 모험을 완성할 것이다. 조바심 때문에 물을 두 배로 주어도, 온갖 좋다는 비료를 쏟아부어도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를 수 있어도 여정 자체를 바꿀 수는 없을 터였다. 아주 천천히 자라는 배추와 무, 그리고 쑥쑥 자라는 쪽파에서 우리 아이들 모습이 겹쳐 보였다. 더디다고 채근하고 빠르다고 기뻐해도 그저 순간일 뿐이다. 모험을 완성하는 건 아이들의 몫일 테니 말이다. 부모의 역할이란 가을 한 평 텃밭의 소박한 텃밭러처럼 가끔 물을 주고 드물게 잡초를 뽑아 주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텃밭에서 인생을 한 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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