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텃밭러의 사색 2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다 모처럼 날이 좋은 주말을 맞이했다. 뜬금없이 고백하자면 소박한 텃밭러는 모순덩어리다.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필연적으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으나 내가 봐도 난 좀 그렇다. 땡볕이 쨍쨍 내리쬐면 소나기라도 시원하게 퍼부어 한 평 텃밭을 촉촉하게 적셔주면 좋겠다 싶다. 그럼 무더위에 뻘뻘 땀 흘리며 텃밭에 물 주러 가지 않아도 좋으니 말이다. 게다가 산(山) 모기에게 한번 뜯기면 여간 괴로운 게 아니니 텃밭이 선사하는 행복과 모기가 전달하는 고통을 저울질하게 된다. 장맛비가 며칠간 계속되자 상황은 역전한다. 오이와 고추와 방울토마토를 받쳐주는 지지대가 안전하던가? 지난번 텃밭에 올라갔을 때 여간 흔들리던 게 아니었는데 단단히 고정해둘 걸 그랬나? 장맛비에 소중한 채소들이 쓸려 내려가면 어이할꼬! 작은 걱정이 하나둘 모여 태산을 이뤘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장마 언제 끝날지 한숨도 끊이지 않았다. 쨍쨍 내리쬐는 땡볕이 가끔 떠오르는 첫사랑처럼 그리웠다. 하늘처럼 파란 물뿌리개에 물을 한가득 담아 벌겋게 달아오른 텃밭을 식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깟 모기한테 몇 방 물린다고 어떻게 되더냐! 아, 텃밭 추앙자의 이중성이여!
염치란 걸 아는지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인 틈을 타서 텃밭에 쪼르륵 달려갔다. 계단 입구부터 심장이 나댄다. 소중한 녀석들이 또 얼마나 자랐을까! 그런데 텃밭 일대가 시끌벅적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고라니가 다시 텃밭을 습격했단다. 오랜 장마로 녀석들도 먹잇감이 부족했나 보다. 아님, 모처럼 날이 좋아 외식이라도 하기로 작정했든지. 고라니의 텃밭 습격 사건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등산로로 연결된 뒷동산에는 아파트 경계를 따라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도록 펜스가 쳐있다. 멧돼지나 고라니 침입을 막는 역할도 겸했다. 날쌘 고라니는 그 높은 펜스를 뛰어넘기도 하고 아래로 파고들기도 해 텃밭에 드나들었다. 고라니의 놀라운 운동 능력 때문에 펜스 위, 아래로 날카로운 철망을 쳐두었지만 이번에는 최후의 방어선마저 무너진 모양이었다. 공교롭게도 고라니 습격으로 텃밭을 망친 건 대부분 공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대농들이었다. 텃밭에서 목소리가 큰 분들이었다. 고라니가 철저한 계획하에 그분들 텃밭만 골라 털었을 리 없다. 남들보다 많은 텃밭을 가꿨으니 피해를 입을 확률도 높았을 터였다. 다행히(?) 한 평 텃밭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고라니로부터도, 장맛비로부터도. 휴!
아파트 관리실에서 설치한 철망에 신뢰도가 떨어진 지 오래라 텃밭러들은 각자도생했다. 몇몇 텃밭이 녹색 철망으로 울타리를 두르거나 비닐하우스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언제부턴가 미간이 찌푸려졌다. 울타리는 갈수록 늘어나고 크기도 커졌다. 고즈넉하던 텃밭 일대가 점점 삭막해졌다.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던 목가적인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울타리를 거두고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지만, 성난 이웃들의 반응은 불 보듯 뻔했다. 두 해 전 여름과 가을 경계에 심은 배추와 무 모종을 고스란히 고라니에게 헌납한 적이 있었다. '오, 이것 봐라,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감히 한 평 텃밭을!" 고까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너희도 얼마나 배고프면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내려왔겠냐.' 동시에 측은함도 일었다. 결국 모종을 다시 심었고 그 해 무 농사는 제법 쏠쏠했다. 모종을 구입하느라 추가로 쓴 비용은 만 원을 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공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대농(大農) 중에 수확한 채소를 내다 파는 분들은 하나도 없다. 재미로, 운동삼아, 시간을 메우려고 텃밭을 일군다. 가족, 친지와 나누고 이웃과도 나눈다. 소박한 텃밭러도 그분들께 쌈채소며 감자며 옥수수를 제법 얻어먹었다. 그분들 또한 인심 좋은 이웃이었다. 그 따뜻한 마음의 한 귀퉁이라도 고라니에게도 내주면 어떨까?
공장식 텃밭을 운영하는 대농들은 대규모 개간사업을 통해 더 많은 텃밭을 확보했다. 텃밭 일대뿐만 아니라 (아파트 경계선 내에 있는) 공유지 일부를 개간해 작물을 심었다. 그 과정에서 나무도 풀들도 훼손되었다. 어쩌면 그 식물들이 고라니의 먹잇감일지도 몰랐다. 고라니 입장에서는 인간이 자꾸만 자기의 삶의 터전을 습격해 오는 것이리라. 고라니는 결코 인간처럼 뾰족한 철망을 세우지 않았다. 그 대신 저만치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비로소 그들은 전진했다. 사실 해법은 간단했다. 인간이 고라니를 구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선을 넘으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선을 넘게 된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수천 년 동안 동물(가축과 야생동물)로부터 세균에 감염된 인간은 강력하고 재능 넘치는 항체를 진화시켰다. 그런 슈퍼 항체도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 싸우는 바이러스라 정보도 사전 지식도 없기 때문이다. 선배 항체로부터 아무런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진화의 역사에서) 신입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전문가들은 새로운 바이러스가 더 빈번하게 인간을 덮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역시 원인은 간단하다. 그동안 인간과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야생 동물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 인간이나 인간이 키우는 가축과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았던가! 풍요의 수레바퀴를 극단으로 밀어 그들을 옥죄지 않는다면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자연은 자연 상태로 둘 때 가장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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