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러가 읽어야 할 책들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 겨울 1장

by 조이홍

아내가 친정집 김장에 '담글러(김장 담그는 사람의 신조어)'로 참여한 지 벌써 세 해를 맞이했다. 이번 김장은 아내에게 더욱 특별했다. 그간 맡았던 보조 역할이 아니라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팔다리며 어깨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연신 끙끙 앓았다. 김치 먹을 때마다 자기한테 감사 인사하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네네, 그럼요. 굽신굽신. 아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파스를 붙여주다 자연스레 텃밭 이야기가 나왔다. 아내는 고생스럽게 이것저것 심지 말고 한 가지 채소(대파)만 심던가, 아니면 '꽃'을 심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 헉! 채소 텃밭러의 자존심에 순간 깊이 2mm, 폭 3mm, 길이 170mm 상처가 생겼다. 망한 가을 농사에 대한 책임을 돌려까기로 묻는 듯했다. "다음엔 김장할 때 쓸 수 있게 무랑 배추도 잘 키울게." 했더니 괜히 텃밭에 힘 빼지 말란다. 토라져도 단단히 토라진 게 틀림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랄 뿐. 마지막 남은 한 포기 배추를 고라니에게 양보하고 올해 농사를 갈무리했다. 파릇한 쪽파가 텃밭 귀퉁이를 지키고 있지만 그대로 겨울나기 할 참이다. 추운 겨울을 묵묵히 이겨낸 쪽파는 강한 생명력으로 몇 배는 더 쑥쑥 자랄 터였다. 농부나 정원가에게 더 이상 돌볼 식물이 없다는 건 겨울이 왔다는 걸 의미했다. 그간 열심히 일한 땅에도 기나긴 휴식을 선물할 차례였다. 땅이 겨울잠(카렐 차페크는 잠든 듯한 모습 너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사람들은 미처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지만)을 자는 동안 텃밭러는 무얼 해야 할까? 사실 봄은 아직 까마득히 멀기에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렇다고 마냥 놀 수 만도 없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바로 책이다. 텃밭 가꾸기 이론과 실제부터 마음 가짐을 한껏 고양시키는 좋은 책들을 가까이하는 것으로 텃밭러의 겨울은 비로소 시작된다. 책은 세상을 향해 난 가장 작은 창이자 문명의 총체적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물 창고다. 풍성한 텃밭을 꿈꾼다면 마땅히 읽어 두어야 할 책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

<방구석 가드닝> 앤젤라 S. 저드, 문학수첩

이 책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지금까지 실패한 식물들, 브로콜리, 딸기, 블루베리, 양배추 재배를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식물 가꾸기는 절대 글만으로는 배울 수 없다고 믿지만, <방구석 가드닝>은 텃밭 가꾸기의 기초 지식과 정보는 물론 집에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식물 가꾸기의 다양한 사례를 제공해 불안한 초심자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주는 책이다. 특히 별도의 텃밭이나 정원이 없더라도 식물을 재배할 수 있는 컨테이너(우리가 아는 그 화물 수송용이 아니라 화분을 포함해 식물을 심을 수 있는 '용기'를 의미)를 활용한 가드닝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주말 농장이나 텃밭까지 가지 않더라도 직접 유기농 먹거리를 재배하도록 지혜와 용기를 북돋아준다. 식물 재배에 필요한 도구, 화분용 영양토, 컨테이너의 종류와 크기뿐만 아니라 간단한 식물부터 제법 손이 가는 식물까지 50여 가지 채소, 허브, 과일, 식용 꽃 등의 재배 방법을 예쁜 그림과 함께 설명해 준다. 각 식물별로 컨테이너 크기, 심는 시기와 형태, 빛, 물, 양분, 그리고 수확 시기까지 꼼꼼하게 챙겨 어떻게 텃밭 가꾸기를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 그대로 가이드를 제시해 준다. 아마 이 책을 읽으면 빛이 잘 드는 베란다나 거실에 채소용 화분을 들여놓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댈지도 모른다. 그 욕망과 마주하게 되기를, 내 손으로 건강하고 맛 좋은 채소를 가꾸는 행복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원가의 열두 달> 카렐 차페크, 펜연필독약

고백하자면 사계절의 텃밭과 그곳에서 기른 채소들, 그리고 이에 얽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담은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전적으로 <정원가의 열두 달> 탓이었다. 카렐 차페크는 계절이 한 바퀴 도는 12개월 동안 정원에서, 그리고 정원가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특유의 위트 어린 시선으로 담아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백 년이 넘도록 받았다. 그처럼 가드닝에 조예가 깊지도, 삶을 성찰하는 철학자의 시선도 가지지 못했지만, 손바닥만 한 텃밭을 아이들과 가꾸고 그곳에서 나온 채소들을 이웃과 나눠 먹으면서 겪는 일상을 기록하고 싶었다. 가끔 소재가 고갈되거나 처음 결심이 무뎌져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이 책을 꺼내 다시 읽었다.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닮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렐 차페크의 문장을 유난히 많이 인용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이 책 덕분에 가드닝에 관해, 예를 들어 '흙과 비료, 잡초 뽑기' 같은, 제법 실질적인 조언을 얻기도 했지만, 식물을 사랑하는 정원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게 무엇보다 큰 소득이었다. "감히 말하건대, 자연에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겨울잠에 든다는 표현도 사실 틀린 말이다. 그저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들어설 뿐. 생명이란 영원한 것. 섣불리 끝을 가늠하지 말고 인내하며 기다려보라."라는 문장을 읽을 때 마침 대선 결과가 나왔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앞이 캄캄했지만, 인내하고 5년 후를 기다려 보리라 마음먹었다. 시간은 비단 정원에 핀 장미나 라벤더, 아네모네나 캐모마일뿐만 아니라 정원사도 성장하게 해 주었다. 풍성한 가을이 끝나 겨울이 온다고 생이 끝나는 건 아니었다. 다시 만물이 태동하는 봄은 어김없이 찾아올 테니 말이다. 그래서 카렐 차페크의 다음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친구여, 그대는 저 구름들조차 우리 발밑의 흙만큼 변화무쌍하지도 아름답지도 경외할 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작은 씨앗 하나가 흙에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놀랍게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다. 어떤가, 다음 해에는 우주를 관장하는 신이 되어보고 싶지 않은가!

<조화로운 삶> 스코트 & 헬렌 니어링, 보리

<정원가의 열두 달>이 <소박한 한 평 텃밭러의 사계절>의 전반부를 쓰는데 원동력이 되었다면 후반부는 스코트 & 헬렌 니어링 부부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아내는 엉뚱하다고 느꼈을 테지만, 나름 진지하게 '비건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들 부부와 만났고 금방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루에 네 시간, 일 년에 여섯 달만 일하는 삶은 어떨까? 게다가 나머지 시간에는 책 읽기, 여행하기, 글쓰기, 음악 듣기나 연주하기 등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실컷 할 수 있다면? 재벌 3세나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삶을 이들 부부는 어떻게 실천했을까 궁금했다. 바보야, 문제는 돈(경제력)이 아니라고! 부부는 스스로 텃밭을 일구어 식탁에 오르는 80% 이상을 직접 가꾸고, 육식을 금하며,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대부분 직접 만들었다. 심지어 집까지도. 이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조화로운 삶>이었다. 부부는 대공황과 1차 세계대전으로 기존에 믿고 있던 가치들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방법으로 삶을 개척해 나가고자 했고 이에 익숙한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버몬트에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꾸려나가기로 결심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조화로운 삶이란 이론과 실천,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경쟁을 일삼고 탐욕스러우며,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이론들에 반대한다. 이러한 사회는 자기 배를 채우려고 짐승을 죽이고, 스포츠의 하나로써 또는 그저 힘을 뽐내려고 짐승을 죽인다. 이러한 사회질서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점점 완전하게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거부하는 이론을 세웠기 때문에 될 수 있다면 실천에서도 거부해야 한다.”라는 대목에서 드러나 듯이 부부는 일체의 폭력, 착취, 경쟁을 거부했다. 산골 마을에 낡은 농장을 사들여 직접 집을 짓고, 텃밭을 개간해 일구고, 사탕단풍나무에서 시럽과 설탕을 만들어 적은 돈이지만 자립경제를 꾸려나갔다. 오전 네 시간은 농장일과 텃밭을 가꾸는데 몰두했고 오후 네 시간은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산책을 즐겼다. 때로는 불편하고 늘 가난했지만, 이들 부부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고 서로를 아끼며 오래도록 생의 기쁨을 누렸다. 이쯤 되면 텃밭 가꾸기와 이 책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손을 번쩍 들어 묻고 싶으리라 생각된다. 이들은 직접 땅을 개간하고 다양한 채소를 재배했기에 책에는 텃밭 가꾸기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가 제법 많다. 하지만 이보다는 육식을 금하고 채소를 먹을 때도 감사한 마음을 갖는 이들의 삶의 태도를 되새겨 보면 좋겠다 싶어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육식은 나쁘고 채식은 옳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1분에 한 명씩 아프리카 아이들이 굵어 죽는 반면, 식탁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곡물(옥수수)이 소 먹이로 사용되는지 따져 물으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백 년 전 한 부부가 꿈꾼 '조화로운 삶'이 기후변화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열쇠를 쥔 세대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밥상> 헬렌 니어링, 디자인하우스

아내가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오늘 뭐 먹지?"나 "내일 뭐해 먹지?"가 아닐까 싶다. 어떤 음식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미슐랭 가이드 음식 비평가처럼 언제나 솔직하게 엄마 음식을 평가한다. "이건 짜고 저건 너무 달다", "이건 재료가 따로 놀아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등등 솔직한 고백으로 평화로워야 할 식사 시간을 싸하게 만들기 일쑤다. 아내는 시어머니도 시키지 않은 시집살이를 아이들이 힘들게 시킨다고 투덜대면서도 요리할 때마다 바짝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럴 때면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가 있다. "사람은 왜 세 끼를 먹는 걸까" 요리하다 말고 어느새 근본적 회의론자로 변했다. 그럴 때는 옆에서 알짱거리다가 불벼락 맞기 십상이다. 피하는 것만이 살길.


아내처럼 매일 삼 시 세끼를 고민하는 주부(성별에 상관없이)들을 위해 헬렌 니어링 여사가 쓴 책이 바로 <소박한 밥상>이다. 직접 채배한 채소와 견과류 등으로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를 소개한 요리책이지만, '요리하지 않는 요리책'으로 더 유명하다. 니어링 여사가 서문에서 직접 밝힌 것처럼 '복잡하고 세련된 사람들을 위한 복잡한 음식이 아닌,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위한 소박한 음식'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채식을 즐기거나 채소를 좋아하는 사람이므로 이 책에 나온 레시피를 익혀두면 비상시(?)에 써먹기에 그만일 터였다. 니어링 여사가 직접 개발한 레시피는 이런 식이다. 재료만 있다면 갑자기 국가대표 축구팀이 식사 시간에 들이닥쳐도 문제없다.


※ 뮤즐리

- 귀리 (쉽게 무르지 않는 것으로) 2컵

- 사과 (껍질 벗기지 말고 갈아서) 4컵

- 견과 (갈거나 다져서) 또는 해바라기 씨앗 1/2컵

- 건포도 1/4컵

- 레몬즙 (껍질 간 것을 첨가해도 좋다) 1큰술

- 사과는 잘게 썬다. 재료를 모두 섞어 즉석에서 먹는다. 단맛을 좋아한다면 꿀이나 메이플 시럽을 넣는다.

※ 바나나 두부 푸딩

- 바나나 잘 익은 것 3개, 두부 2모, 메이플 시럽 3큰술, 계핏가루나 너트맥 약간

- 바나나를 블렌더에 넣고, 두부를 깍둑썰기해서 바나나에 섞고 메이플 시럽을 넣는다. 재료를 함께 블렌더에 간다. 그릇에 담고 위에 계핏가루나 너트맥을 뿌려서 낸다.


우리가 흔히 '요리책'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 책에는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요리법은 어찌나 간단한지 "만일 가로, 세로 9 x 15 센티미터 카드에 다 적지 못할 조리법이라면 잊어버리자."라고 말할 정도다. 계량도 하지 않고. 화려한 플레이팅이나 먹음직스러운 사진도 없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간편하게 만든다'는 무슨 밀키트 광고 카피 같지만, 니어링 여사가 추구하는 요리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트 & 헬렌 니어링 부부는 평생 채식을 즐기며 건강하게 장수했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한 셈이다. 이들은 식사할 때 식탁에 오른 각종 채소로 만든 음식들에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육식 습관을 버리고 채식한다 해도, 우리가 생명체를 꺾어서 삼키고 소화하게 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래서 식사할 때 무, 당근, 상추, 사과, 오렌지에게 사과한다. 어느 날인가 우리가 피부에 햇빛을 받고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마 누군가 눈앞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손발이 오그라들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은 오직 삶과 앎이 분리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고, 니어링 역사는 평생 이런 삶을 살았다. <소박한 밥상>에 나온 레시피를 많은 주부가 따라 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니어링 여사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도 가슴에 새기면 좋겠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소비할까? 식물은 땅에서 중요한 존재이다. 나는 나무를 자를 때면 나무에게 인사를 보낸다. 데이지나 팬지꽃을 뽑을 때나 사과나 무를 깨물 때면 내 마음은 오그라든다. 내가 뭐길래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단 말인가? 우리는 지상의 모든 것에 연민을 갖고, 최대한 많은 것에 유익을 주고, 최소한의 것에 해를 끼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 평 텃밭에서 상추며 오이, 가지나 고추를 딸 때 이런 마음 가짐을 가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책을 읽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나와 같은 부류가 정상이고 니어링 여사가 별종이었다. 그래도 별 탈 없이 세계는 나아갔다. 하지만 미래도 과거와 같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현실을 살뿐이니까. 그래도 별종이 점점 많아지면 좋겠다. 지상의 모든 것에 연민을 갖고 최소한의 것에 해를 끼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 말이다. 미래에는 나와 같은 부류가 별종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고리나 텃밭> 김병하, 사계절

10년 넘게 한 평 텃밭을 가꾸면서 고라니의 습격을 받은 건 딱 두 차례였다. 지난해와 올해. 공교롭게도 피해를 본 작물은 모두 배추였다. 돌이켜보니 처음 텃밭 가꾸기를 시작하고 서너 해 동안 한 평 텃밭을 포함해 어떤 이웃들도 고라니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 그즈음에는 허허벌판에 우리 아파트 단지만 덜렁 서 있었다. 그때는 아직 고라니가 뛰어놀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산이 깎여나가고 집들이 들어섰다. 전원주택으로 입지가 좋아 날이 갈수록 주거지가 늘어났다. 어떤 해에는 야산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사실은 고라니가 텃밭을 습격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그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했다. 그로부터 10년, 해마다 고라니나 멧돼지에게 농작물 피해를 입는 주민들이 늘어났다. 동네 뒷산과 아파트 경계에는 날카로운 철조망이 둘러지고 텃밭마다 울타리가 생겼다. 목가적인 풍경이 어느새 흉물스럽게 변했다. 고라니와 텃밭러의 전쟁에서 과연 누가 승리할까? 사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더 절박한 쪽이 이길 게 분명하다. 고라니에게 텃밭 습격은 '생존의 문제'이다. 과연 누가 더 절박할까?


인간이 고라니의 보금자리를 빼앗았으니 고라니가 인간의 텃밭을 습격해도 감내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비록 이웃 중에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분들은 없지만,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몇 개월에 걸쳐 공들여 가꾼 채소를 하루아침에 잃는다면 누구라도 마음 상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불행은 반복될 게 분명하다. 김병하 작가 그림책 <고라니 텃밭>에는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들어 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 우리 역시 자연에 기대어 사는,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지막 배추를 고라니에게 양보한 건 어쩌면 이 그림책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 차원에서 해답을 될 수 있지만, 비록 동화 같아도, 한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질문에 대한 해답이자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기도 하다.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모든 복잡한 문제가 그렇듯이 어렵다고 풀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를 외면하면 누군가는 선의의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 오늘 내 텃밭이 안전했다고 내일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 세대에 지구가 적당히 따뜻하다고 다음 세대에도 따뜻하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진정한 의미의 '공존'을 고민하지 않으면 '공멸'을 속절없디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라니 텃밭>의 우화는 고민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이밖에도 소개할 책들이 몇 권 더 있지만 쓰다 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다. 나머지 책들은 다음 기회에 소개할까 한다. 이제 겨우 겨울이 첫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겨울은 생각보다 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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