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붉은신>을 읽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 세 번째 작품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우리 드라마 <도깨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왠지 어깨가 으쓱!). 원작이나 참고할만한 작품이 없어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한 친구가 <도깨비>를 추천해 주었다고 합니다. 신카이 마코도 감독은 극 중 도깨비가 '문'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게 무척 재미있는 발상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작품에 그 아이디어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이(異) 세계의 재난(지진)이 현실에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 주인공(스즈메와 소타)이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문'을 찾아 닫는 것입니다.
문을 닫지 못하면 저쪽 세계의 재난이 현실에서 일어납니다. 고작 가로 1미터, 세로 2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문에 세계(까지는 아니고 일본)의 운명과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주인공이 얼마나 철저하게 '문단속'을 해야 할지 짐작되시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지만 <도깨비>의 문과 <스즈메의 문단속>의 문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 납니다. 하나는 행복을, 다른 하나는 불행을 불러오니까요.
여기에 문보다 더 작은 무언가가 있습니다. 크기는 가로 267밀리미터, 세로 244밀리미터, 그리고 폭은 겨우 13밀리미터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게는 달랑 722그램. 이 물건이 무엇인지 눈치채셨나요? 바로 '그림책'입니다. 세상을 향해 난 가장 작은 창(窓)입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식으로 말하자면 저쪽 세계의 불행한 현실이 우리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속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문'도 아닌데 어떻게 단속해야 할까요? 정답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읽고 행동하고, 작더라도 선한 영향력을 다른 이에게 행사하면 됩니다. <스즈메의 문단속> 주인공처럼 죽어라 고생할 일은 없으니 다행입니다.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고 마주 보고 있으면 기분 좋아집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그럴 때면 시간이 상대적이라는 걸 진심 깨닫게 됩니다. '순삭'이니까요. 그 반대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책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다들 그런 경험 한두 번은 있으시잖아요? 그렇죠? 그건 여러분이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쁜 병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연히 읽은 오승민 작가의 <붉은신>이 제게 그랬습니다. 다 읽고 책장을 덮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자꾸만 우울해졌습니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매해 약 6억 마리 동물들이 실험체가 되어 고통받는다고 합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실험실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우리처럼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담보로 우리는 더 아름답게, 더 풍요롭게 오늘을 삽니다. 과거부터 쭉 그래왔다고 미래에도 계속 그래야만 할까요? 애완동물이 반려동물이 된 세상, 더 나아가 가장 연약한 존재들에게까지 손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림책 <붉은신>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그림책 내용은 이렇습니다. “죽음에서 삶으로 돌려보내 주는 붉은신이 있다네.” 할아비 쥐의 노래를 기억하는 주인공 생쥐 ‘꼬리끝’은 붉은신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고 들판에서 하얀 배를 발견합니다. 배 안에는 애타게 찾는 붉은신 대신 검은 눈물을 흘리는 토끼, 괴물처럼 변한 개구리, 뼈만 앙상하게 남은 개, 손바닥만 한 우리에 갇혀 미쳐가는 하얀 쥐들이 있습니다. 모두 두발이(인간)에 의해 실험체가 된 불쌍한 동물들입니다. 희망을 찾아왔지만 꼬리끝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절망이었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로 떨어진 꼬리끝은 폐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오랑우탄 559를 만납니다. 실험체로서 가치도 없어 버려진 존재였지요. 꼬리끝은 포기하지 않고 559와 함께 길을 찾습니다. 작은 풀꽃들 위로 높은 굴뚝 구멍이 보입니다. 버려진 철창을 쌓고 오르고 올라 인간이 박아 놓은 철 사다리에 닿습니다. 다시 또 오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559와 꼬리끝은 붉은신을 마주합니다. 그 순간 559는 ‘긴팔’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냅니다. 붉은신(태양)이 하늘을 오묘한 색으로 물들입니다. 점점 사그라들어 가는 붉은빛. 다시 어둠이 몰려오기 전에 긴팔이 말합니다. “꼬리끝, 저 밑에 친구들이 아직 있어.” 꼬리끝과 긴팔이의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물실험에 관한 그림책을 처음 읽은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이 작품이 제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까요? 사실 제가 가장 궁금합니다. 그림책 한 권이 크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면 얼마나 무거울까요? 그런데 <붉은신>은 제게 엄청 크고 엄청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스즈메가 목숨을 걸고 문을 닫으려고 했던 것처럼 저도 이 책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미 벌어지고 있지만 말입니다. 더, 더, 더 나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습니다. 당장은 이 책을 여러분께 '돌려드리는 것'으로 첫 임무를 완수하려고 합니다. 다음 임무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소타 같은 미소년 조력자가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 글을 읽고 가장 연약한 존재에게도 손 내미는 누군가와 뜻을 함께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문은 드라마도 만화도 아닌 진짜 현실의 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