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deja vu)

역사는 똑같은 방향으로만 반복되지 않는다?

by 조이홍

1987년 6월


찰싹!

상구는 홧김에 휘두른 손찌검에 저부터 화들짝 놀랐다. 경선의 뽀얀 볼이 금방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도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지 요동치는 눈빛이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딸에 대한 죄책감을 꿀꺽 삼켜버린 상구는 사그라들던 분노에 힘껏 풀무질했다.

"이 아비가 너를 어떻게 공부시켰는데, 대학생이 공부나 할 것이지, 무슨 데모를 해, 데모를!"

"어떻게 시대의 부조리에 눈감으란 말이에요. 전 그렇게는 못해요.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게 우리 세대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라고요!"

"뭐라고?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떠드는 거냐? 이 나라를 어떻게 세웠는데! 경찰 아비 둔 덕에 좋은 집에서 좋은 옷 입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고 사는 거야! 네가 가난을, 배고픔을 알아?"

"그래서 더 치열하게 싸우는 거예요. 쪽팔려서요."

찰싹!


2022년 3월


주름진 경선의 손이 범준의 얼굴 앞에서 순간 멈췄다. 뻐대던 아들도 흠칫했다. 경선은 아들에게 끝까지 손찌검하지 않은 자신에게 감사했다. 고성이 오가며 상대방의 심장을 겨눠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손찌검하는 일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젊은 날의 그녀가 청춘을 바친 대가로 얻은 가치였다. 그녀는 가슴을 한껏 부풀려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싸움닭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자장가를 불러주 듯 찬찬히, 아주 찬찬히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타래를 풀었다.

"지금 너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들이 엄마가 너만 한 나이 때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어. 수많은 피와 눈물로 얻어낸 값진 것들이지.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도둑맞을지 몰라."

"저는 오직 저를 위해 살 거예요. 진보니 보수니 유행 지난 이념 따위에는 관심도 없어요. 그저 남들처럼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고 싶을 뿐이라고요! 그게 뭐가 나쁘죠?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게 바로 기성세대라고요. 받아본 적도 없는 혜택 때문에 역차별받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요!"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나가야 해, 오직 앞으로만…. 네 선택이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너를 덮칠지도 몰라."


2050년 5월


찰싹!

범준은 저도 모르게 휘두른 손찌검에 덜컥 겁부터 났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손찌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민의 뽀얀 볼에 붉은 손자국이 선명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지금 아버지는 가정폭력방지법, 청소년 보호법을 모두 위반하셨어요. 아시죠?"

"본질을 흐리지 마. 지금이 어느 땐데 고등학생이 데모를 해, 데모를!"

"비틀어진 역사를 제 궤도에 올려놓으려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중학생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하나뿐인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네가 역사에 대해 뭘 안다고 데모야, 데모는!"

"그래요, 역사가 뭔지 잘 몰라요. 그래도 쪽팔린 건 알아요.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당연한 사실마저 외면한 아버지 세대가 결국 이 나라를 어디로 몰고 갔나요? 더 빼앗길 자존심도, 희망도 없다고요. 이렇게 투쟁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린 뭘 위해 살아야 하지요? 사람은 빵만으론 살 수 없는 존재라면서요."

범준은 문득 아주 오래전 어머니와 심하게 말다툼했던 일이 떠올랐다. 20대 대통령 선거 전날이었더랬다. 그날의 선택이 모든 걸 바꿔놓았다. 그때 엄마 말을 들었더라면 미래가 달라졌을까. 범준은 갑자기 지독한 한기를 느꼈다. 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5월로 기록된 날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적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전에 쓴 한뼘소설을 다시 썼습니다. 시절이 하도 수상해서요. 별다른 정치적 의도는 없습니다만, 조지 오웰의 다음 문장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바른 MBTI 검사받아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