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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un 01. 2024

태초의 인간

<한뼘소설> 19화

푸루샤는 최초의 존재였다. 처음에는 그를 지칭할만한 언어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소음조차 없던 시기였다. 푸루샤가 이름을 갖게 된 건 아주 아주 먼 훗날의 일이었다. 


푸루샤가 처음 눈을 떴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을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공허(空虛)나 고독(孤獨)이려니 유추할 뿐. 그것이 태초에 눈 뜬 이의 업(業)이었다. 푸루샤는 왜 자신이어야 했는지 질문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 질문할지조차 몰랐으니.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겁(劫)이 그에게로 흘러갔고, 또 흘러나왔다. 무(無)조차 허(虛)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눈을 떴다.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가졌다. 죽음, 그것이 내 이름이었다. 푸루샤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나였다. 극한의 외로움에 요동치는 몸부림이 나에게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만나기 전부터 이미 서로의 존재를 어렴풋하게 느꼈다.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있었지만, 그건 역설적으로 바로 곁에 있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광활한 세계에 오직 둘만 존재했으므로 우리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내가 말했다.

"외롭니? 나와 하나가 될래? 그럼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푸루샤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재촉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시간이 많았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푸루샤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 나를 삼켰다. 나는 그의 일부가 되었다. 그와 내가 한 몸이 되자 갑자기 세상이 요동쳤다.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계절이 탄생했다. 비가 내렸고 꽃이 피었다. 그리고 희생된 푸루샤의 주검에서 생명이 태동했다. 푸루샤의 몸을 빌어 탄생한 존재들은 나보다 그를 더 닮았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 흔적 역시 지울 수 없었다. 그들은 찬란했으나 유한했다. 떠들썩했지만 외로웠다. 머지않아 그들은 깨달았다. 서로에게 기대야 함을, 서로를 사랑해야 함을. 그래야 외롭지 않고, 그래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를 인간(人間)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그들에게 생명을 준 존재를 푸루샤, 즉 '태초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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