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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May 25. 2024

거짓말

<한뼘소설> 18화

인생 말년에 개과천선한 스크루지가 사후 지옥에 갔다. 지옥문 앞에서 옛 친구 말리가 그를 기다렸다.


"어땠나 친구?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선(善)을 행한 기분이?"

"자네 덕분에 축복받았네. 다른 사람을 돕는 게 그토록 기쁜 줄 알았다면 진작에 그랬을 거야. 수전노였던 내게 두 번째 삶을 주었다네. 고맙네, 정말."

"베푸는 자의 기쁨을 깨달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네. 이제 가지."

"오랜 친구여, 궁금한 점이 있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네. 평생 모은 돈을 몽땅 사회에 기부했다네. 이웃들과 웃고 울며 더불어 살았지. 무언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신(神)의 대답이 지옥일 줄은…."

"자네는 일평생 다른 사람의 고혈을 짜내 재산을 긁어모았네. 자네 때문에 피눈물을 흘린 이들이 몇인 줄 아나? 이루 헤아릴 수 없다네. 그건 시간이 흐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네. 자네 안에 켜켜이 쌓이지."

"그걸 알면서 왜 나에게 새 삶을 살 기회를 주었나?"

"인간이 죽어 이곳에 오면 신께 심판을 받게 된다네. 그런데 지옥에도 새 바람이 불어 민주주의가 유행하더니 얼마 전부터 변호사 제도가 생겼지. 내가 변론해야 할 첫 영혼이 바로 자네였다네. 자네가 고집불통 구두쇠로 지옥에 오게 된다면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우리 둘을 위해 필요한 조치였네."

"왜 더 일찍 와 주지 않았나?"

"왜 스스로 깨우치지 못했나!"

"나이 들어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건가?"

"그렇지 않다네. 검사 측과 다툴 여지가 충분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고약한 불지옥은 면하게 해 줄 테니 걱정 말게. 하지만 생각해 보게. 수전노로 평생 남을 괴롭히던 이가 말년의 깜짝 선행으로 천국에 간다면 누가 평생 착하게 살겠나? 신께서는 그런 본보기를 원하지 않는다네. 어이쿠, 늦었네. 그만 가지."


스쿠루지의 두 눈이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문득 궁금했다. 과연 천국이 있긴 할까? 어쩌면 천국이란 지옥에서 만든 지독한 거짓말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엉뚱한 신의 고약한 장난일지도…. 그 순간 거대한 지옥문이 스르륵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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