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를 발견하다
인도에 도착한 첫날. 호텔 루프탑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미친 듯이 피자를 욱여넣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여름이 막 지나자마자 떠나온 터라 인도의 날씨는 여전히 더웠다. 하지만 2만 원짜리 방에 에어컨이 있을 리 없었다. 천장에 매달려 느긋하게 빙그르르 돌아가는 실링팬이 전부였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욕실에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에 쪼그려 앉아 입고 있던 옷가지와 속옷을 대충 조물조물 빨았다.
떠나오기 전 인도 여행을 준비할 때, 배낭의 무게는 자신의 삶의 무게와 같다는 이상한 명언에 취했을 때라 가지고 온 것은 티 두벌과 바지 하나, 속옷 한벌뿐이었기에 빨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흥건한 옷가지를 탈탈 털어서 창틀에 널었다. 이내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건으로 대충 받쳐놓고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았던 터라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호텔 밑에 있는 컴퓨터방이었다. 나름 IT강국으로 여겨지는 인도였기에 인터넷은 잘 되어있겠단 생각에 첫날은 이것저것 웹서핑을 하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털사이트 창 여는데 5분, 검색어 하나 치고 기다리는 시간 또 5분... 초고색 인터넷망에 적응되어 있는 한국사람들은 컴퓨터를 몇 대 부수어버리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뉴스를 하나 클릭해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몇 안 되는 여행자들이 인터넷 창과 씨름 중이었다. 그중 눈에 들어온 한 사람. '아오 씨. 진짜. 아오. 휴. 미친. 아, 진짜.'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한국 남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얼핏 봐도 내 또래로 보였다. 나처럼 인도에 아직 적응을 채 하지 못한 상태였는지 연신 컴퓨터를 노려보며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있었다. 욕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아직 하얀 화면이 나오는 모니터를 한번 바라보고 용기를 내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아오. 씨. 이런 뭣 같은. 이런 씨... 네?"
모니터를 향해 속사포 욕을 내뱉던 남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국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어디서 묵고 계세요? 저는 오늘 처음 왔는데, 여행하기 괜찮은가요?"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게다가 남자에게... 남자는 그런 내 관심이 싫지는 않았는지 이내 친절하게 답해줬다.
"아, 저는 여기 위에 호텔에 묵고 있어요. 온 지 3일 됐나? 오늘 오신 거예요?"
나와 같은 호텔에 머문다니 뭔가 안심이 됐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자리에서 한참이나 컴퓨터와 씨름하고는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남자에게 들은 정보를 토대로 근처 맥주 숍에서 인도 맥주를 잔뜩 사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 오늘은 그냥 방에 있자.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창밖을 내다봤다. 1초에 100번씩 들리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개 짖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타국의 말을 들으며 방구석에 앉아 내일 일정을 짜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다 마신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문에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저기.. 저기요~?"
한국사람이었다.
"누구세요??????"
"저, 아까 밑에서 봤던 사람인데요. 내일 어디 가실 거예요?"
문을 빼꼼 열어 쳐다보니, 좀 전에 만났던 남자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서있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나는 자신 있게 문을 열어젖히고 대화를 이어갔다.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원래 가려던 곳은 아그라인데, 오늘 좀 힘든 일들이 있어서 근처 돌아보려고요."
"아, 그래요? 저도 내일 주변 돌아볼까 하거든요. 같이 가실래요?"
해외에 나가면 한국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지만, 그래도 혼자 다니는 것보단 괜찮다는 생각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호텔 앞에서 오전 9시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남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은 술을 마시며, 한국에서 떠나온 이틀을 곱씹었다. 조력자들을 만나 무사히 도착한 이곳 인도. 남은 시간은 한 달.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