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할 수 있을까
지금껏 중독된 듯 수많은 여행을 다녔다. 지금은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떠나는 게 쉽지 않지만 한때는 여행이 일상이었다.
인도에 갔을 때다. 성인이 되어서 첫 해외여행이자 배낭여행을 하기 위해 인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목표는 단 하나, 샤 자한의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서였다.
첫 번째 여행이라 떨렸고, 동행 없이 오랜 시간 동안 해외에 나간다는 것도 조금 두려웠다. 하지만 설렘이 더 컸고, 무언가를 스스로 해내고 있다는 뿌듯함에 비행 내내 즐거웠다.
첫 번째 관문은 경유지인 태국. 입국심사를 하는데, 입국 용지에 머무를 주소를 쓰지 않아 심사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국은 잠깐 경유하는 곳으로 스톱오버를 신청하지도 않았고, 8시간 정도 머무를 호텔만 예약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호텔 이름만 알뿐 주소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온터라 어버버버 거리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려야 했다.
난감한 그 순간, 입국심사대를 먼저 통과했던 한국인 아저씨 한분이 공항을 지키는 경호원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다가와 꼬부랑글씨로 주소를 적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감사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아저씨는 세상에 쿨가이 선발대회가 있다면 단연 1등을 먹어야 할 만큼 멋있는 자태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어찌어찌 태국 땅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현지 시각으로 새벽 2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관문은 호텔까지 무사히 택시를 타는 일이었다.
어차피 영어가 짧아서 긴 대화는 안됐겠지만, 태국 택시기사님이 도통 영어를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가방 구석에 구겨져 있던 호텔 예약 용지를 꺼내 보여주자 택시 기사님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내 어리바리한 내 모습에 불친절한 모습으로 돌변했다.
이 택시를 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같이 비행기 옆자리에 타고 왔던 태국 청년이었다. 한국말을 할 줄 알았기에 비행 내내 함께 수다를 떨며 왔었다. 일산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던 태국 청년은 마중 나온 부모님과 함께 내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 물었다.
"택시를 타야 하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시나 봐요. 말도 안 통하고, 어떻게 하죠?"
태국 청년은 내가 내민 호텔 예약 용지를 보더니, 뭐라 뭐라 택시기사에게 다다다 말을 한 다음 나를 안심시켰다.
"여기 가달라고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전화."
긴장이 잔뜩 서린 내 어깨를 토닥이며, 호텔 예약 용지 뒤에 자신의 이름과 현지 전화번호를 적어주고는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 본 태국 청년의 부모님도 내가 걱정됐는지, 몇 번이고 택시기사님께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모르게 든든해져 기세 등등한 모습으로 택시에 올라탔다. 가는 내내 손에 땀이 났지만, 손에 있는 태국 청년 '피샤'의 전화번호를 곱씹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바라봤다.
드디어 도착한 호텔. 택시에서 도망치듯 뛰어내려 로비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이름만 같은 다른 호텔이었던 것이다.
예약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난감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호텔 지배인은 내가 갖고 있던 종이를 뺏어 들고는 여기가 아니고 5분 정도 더 돌아가면 같은 이름의 다른 호텔이 있다고 말해줬다.
감사 인사를 꾸벅하고 호텔을 나섰지만, 막막했다. 새벽 3시를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아무 택시나 잡아타고 호텔 이름을 말했다.
이번 택시기사님은 별말 없이 내 말을 듣자마자 목적지로 향했다. 택시를 탄지 3분이 지났을까. 드디어 내가 예약한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택시 기사님은 거스름돈을 주지 않았고, 그대로 나와 멀어져 갔다.
어쨌든 무사히 도착했기에 예약한 방에 올라가 안도의 한숨의 내쉬고는 긴장이 풀려 한참이나 펑펑 울었다. 과연 무사히 인도에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이내 아무리 울어봐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다잡고 욕조에 물을 받아 반신욕을 하며, 서비스 바에 있던 맥주 한 캔을 원샷했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이 되어 주변을 조금 둘러보다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인도 가는 비행기 안은 평온했다. 내 옆에 앉은 인도 아저씨는 한국산 산오징어가 혼자 인도행 비행기에 오르니 뭐가 그리 궁금했는지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인도는 왜 가? 혼자 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여행을 왔다고 말하자 인도에 도착하면 한밤중이라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아침에 이동하라고 일러줬다. 터번을 두른 친절한 인도 아저씨 말에 왠지 마음이 평온해져 전날 못 잤던 잠을 잘 수 있었다.
인도에 도착하니 밤 11시 30분. 입국심사대를 빠져나가 곧장 밖으로 향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공항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번엔 짐이 문제였다. 조그만 가방 하나를 짐으로 부쳤는데, 내 가방만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매고 있던 보조가방에 들은 거라곤 여권과 돈, 휴대폰이 전부였다. 가방 안에는 여행에서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책, 노트, 세면도구, 샴푸, 수건 등등이 들어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아니야, 괜찮아. 없어지면 다 사면되는 것들이니까. 스스로를 다독이며 가방을 찾아 나서기를 십여분.
드디어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던져놓은 것인지 컨베이어 벨트 끝자락에 가방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이산가족이라도 상봉한 듯 너무 기뻐 가방을 끌어안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방을 잘 살펴보니 한쪽 지퍼가 열려있었다.
부랴부랴 안을 확인했다. 다른 것은 다 그대로였는데 샴푸와 린스만 누가 빼간듯했다. 왜 그랬을까. 왜 옷은 안 가져간 걸까. 아무래도 옷은 그 도둑님의 취향이 아닌듯했다.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어찌어찌 아침이 되어 택시를 잡아타고 여행자들의 거리인 빠하르간지로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는 알겠다고 고개극 끄덕이더니 이내 어느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내가 위험할까 봐 이곳에 데려왔다는 말만 반복하며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어차피 대낮이었고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기에 용기를 내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여행사 같은 곳이었다.
사무실에 앉아있던 남자는 내가 들어오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신문 한 장을 내밀었다. 신문 1면에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크리켓 경기 모습이 대문짝만 하게 나와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축구 한일전만큼이나 그곳 사람들에게는 예민한 경기였나 보다.
어쨌든, 파키스탄과 인도의 크리켓 경기에서 파키스탄이 이겨서 인도 사람들이 델리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며 지금 가면 위험하다고 했다. 여기서 아그라로 가는 버스를 타던지, 자기들이 안내해주는 호텔을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 가봐야 호텔방은 다 차서 갈 수가 없다고 겁을 줬다.
미리 잘 곳을 예약하진 않았지만, 봐 둔 곳이 있던 터라 가이드북을 내밀며 내가 갈 호텔을 가리켰다. 그러자 바로 그곳에 전화를 걸며 뭐라 뭐라 얘기한 후 이내 전화를 끊었다.
"방이 없대. 전부 다 찼대. 너 여기 못 감."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갔던 시기는 비수기인 데다 학생들 방학기간도 아니어서 여행객이 별로 없을 시기였다. 여기서 이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다간 집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노노. 내 남자 친구가 델리에서 기다리고 있음. 갈 거임."
있지도 않은 남자 친구를 만들어내며, 나는 꼭 빠하르간지로 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 그에 내 앞에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혹시나 내가 나오는 길 머리채라도 잡힐까 미친 듯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사무실 앞에는 아까 그 택시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흘긴 뒤에 택시에 올라탔다. 어차피 초행길이라 택시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 줄도 몰랐고, 뭐라도 해야 했고, 어디라도 가야 했기에 이판사판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택시기사는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가자는 목적지로 군말 없이 향했다. 하지만, 잠시 후. 내 등 뒤에서 다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를 내려준 곳은 내가 가자고 했던 그 호텔이 아니라, 덩치 큰 인도 사람 몇 명이 문 앞으로 지키고 있는 어느 허름한 호텔 앞이었기 때문이다.
택시가 호텔 골목으로 서서히 진입하자, 호텔 앞에 있던 남자들이 택시 앞으로 다가섰다. 택시기사는 여기밖에 남아있는 호텔이 없으니 여기서 자야 한다고 말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정말 이 호텔에 들어서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온몸이 떨려왔다.
택시가 미처 완전히 서기도 전에 나는 문을 열어젖히고 사람이 많은 방향으로 냅다 뛰었다. 잠깐 뒤를 돌아보니,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 쫓아오진 않았다.
사람이 많은 거리로 들어서서야 나는 걸음을 늦췄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미처 매지 못한 가방을 끌어안고 거리를 뛰어다녔으니 말이다.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 호텔로 들어가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는 생각에 미리 봐 뒀던 그 호텔로 목적지를 정했다. 하지만 좀 전에 들른 사무실에서 예약이 다 찼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물론 거짓말일 확률이 높겠지만, 괜히 또 헛걸음을 하고 거리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 처음 와본 인도, 혼자 있는 이 거리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들어갈만한 곳을 찾았다. 눈앞에 보이는 전화방을 발견하자마자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곤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 진정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엄마아. 나야. 엉엉으엉헝헝허어헝"
꾹 참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져내렸다. 왜 그러냐고 묻는 엄마 말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냉정했다.
"내가 거기 갈 수는 없잖아. 이왕 갔으니까 잘 놀다가 와. 조심히 다니고."
엄마 말이 맞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괜한 겁을 먹은 것도 같았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수화기를 내려놨다.
아까부터 나를 응시하고 있던 전화방 꼬마가 괜찮냐고 말을 건넸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나이로 중학생 정도 돼 보이는 아이였다.
"안 괜찮아요. 으헝헝헝헝. 여기다 전화 좀 걸어줘요. 으엉엉엉. 방 있나 확인해줄 수 있어요? 어으엏어헝헝"
눈망울이 맑은 꼬마의 위로에 나는 다시 눈물을 쏟았다. 좀 전에 사무실에서 방이 다 찼다던 그 호텔에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꼬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다. 뭐라 뭐라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방 있대. 울지 마. 괜츈? 울지 마. 울지 마."
나보다 열 살쯤은 어려 보이는 아이의 토닥임에 나는 다시 눈물을 그쳤다. 조금 진정이 되어서야 아이에게 길을 물었다.
"요기로 해서 조~기로 가면 나와.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도와줄게."
아이는 꼬깃꼬깃한 종이에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알람'의 전화번호를 두 손에 꼭 쥐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가이드북에 나온 그대로였다. 그제야 비로소 진정이 됐다.
호텔방에 짐을 풀고, 세수를 했다. 코도 흥흥 풀고 쉬야도 했다.
진정이 되자 어제오늘 일이 꿈만 같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 정말 괜찮아진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 이내 기분이 좋아져서 호텔 옥상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피자 한 판과 콜라 한 병을 다 먹어치우고서야 나는 진짜 괜찮아졌다.
그렇게 나의 인도 여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