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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사라 May 26. 2021

한 그루의 나무처럼

지금 걸려 넘어진 그 자리가 전환점이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에 한 스승과 네 명의 제자들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마음의 여운으로 남았다.     


스승이 어느 날 제자들에게 먼 곳에 있는 배나무 한그루를 보고 오라는 여행을 보낸다. 첫 번째 제자는 겨울에 가서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차가운 바람 속에 헐벗었고, 껍질 속까지 메말라 있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나무가 못나고, 굽었고, 아무 쓸모 없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 제자는 봄에 가서 나무를 보았다. 나무마다 새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있었다. 뿌리는 끊임없이 생명수를 길어 올리고, 움마다 봄기운을 단단히 오므리고 있었다. 제자는 “앞날이 무척 기대되는 나무”라고 주장했다.    

세 번째 제자는 초여름에 나무를 보러 갔다. 나무는 흰 꽃으로 뒤덮여 있었고 뿌리는 단단히 땅을 움켜쥐고 있었다. 꽃들에서는 감미로운 향기가 났다. 제자는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나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떠난 네 번째 제자는 어떤 평가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가을에 가서 나무와 만난 그는 가지마다 열린 황금빛 열매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 열매들은 태양과 비바람에 자신을 내맡긴 믿음의 결과였다. 제자는 “햇빛과 비를 당분으로 바꾸어 풍요와 결실을 이뤄내는 나무의 연금술에 깊이 감동했다”라고 말했다.     





스승은 네 명의 제자를 불렀다. 모두의 의견이 틀리지 않지만,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고 말했다. 각자 본 것은 그 나무의 한 계절에만 해당하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스승은 말했다.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 한 계절의 고통으로 다른 계절들이 가져다줄 기쁨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만 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고 생각했다. 새싹이 돋는 유아기처럼 봄날과 같은 유년의 계절, 초여름의 신록처럼 푸름을 자랑하는 여름과 같은 청춘의 계절, 수고한 열매를 거두는 가을과 같은 중년의 계절, 나무의 내려놓음처럼 마음을 비워가야 하는 노년의 계절이 모든 사람에게 사계절로 찾아온다고 생각했다.     


사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차례대로 찾아오면 좋은데, 내 인생은 기나긴 겨울이 제일 먼저 찾아왔다. 세찬 겨울바람을 피할 곳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 잎사귀도 없이 늘 헐벗음 자체였다. 한국의 계절은 3~4개월이면 지나가고 변화한다. 하지만 내 인생의 첫 겨울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년이 넘는 긴 겨울을 견디면서 껍질 속 중심부까지 나는 메말라 버렸다. 


첫 번째 제자가 본 겨울나무처럼 ‘내 인생은 못나고, 굽었고, 아무 쓸모 없다’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내 삶에 생명의 힘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죽을 때까지 추운 겨울이 계속될 것이라고 나는 한탄하고 절망했다.     



스물일곱 마음 설레는 인연을 만났다. 세상에 태어나 내 인생에 첫봄이 찾아왔다. 매일같이 세찬 바람과 외로움이 휘몰아치던 내 인생이었다. 봄이 오니 따뜻한 봄 햇살에 가지마다 새움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내 마음에 따뜻한 봄기운이 가득해졌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으며 설렘의 싹이 돋았다. 싹이 돋았던 자리에 ‘사랑’이라는 꽃을 피워 가정을 이루었다. 


결혼 전까지 이성에게 설레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긴 겨울 동안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우고 높은 성벽을 쌓고 살았기 때문이다. 성벽 안에 누가 들어오는 것도 싫었고, 나가는 것도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다가갔을 때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설레는 감정을 마비시켰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목석’이라고 불렀다.     


내 인생의 봄을 맞아 얼어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 시냇물이 졸졸 흘렀다. 사랑의 꽃이 핀 자리에 아들과 딸이 아름다운 열매가 되었다. 인생의 계절 중 겨울을 제일 먼저 맞이했으나 봄을 지나 지금 뜨거운 여름 햇살을 맞이하고 있다.     


심리학자 폴 투르니에는 그의 저서《인생의 사계절》에서 “인생의 모든 계절은 저마다 의미가 있다. 인생은 우리 앞에 놓인 선물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내 인생의 추웠던 겨울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만남을 통해 봄을 맞이했고 그 계절과 함께 성장하고 있다. 계절마다 자연이 추구하는 목적이 있듯이 인간 역시 시기마다 변화된다.      


유년 시절 맞이한 겨울을 통해 나 자신을 ‘못나고 굽었고, 쓸모없다’라고 평가절하했다. 일평생 춥고 헐벗은 나무처럼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겨울은 고통스러워 인생의 계절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다. 춥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겨울은 선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겨울을 통해 남들보다 더 빠르게 성숙할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겨울이 먼저 왔기 때문에 그다음 맞이하는 봄이 훨씬 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인생의 겨울도 의미 깊은 선물이 분명했다.     

인생이 처음부터 봄이었으면 봄의 아름다움과 따사로움에 감탄하지 못했을 것이다. 긴 겨울을 지나 봄이 왔기에 나는 더 찬란하고 행복한 봄을 맞이했다. 인생의 모든 계절은 저마다  의미와 섭리가 담겨 있다.     

 

지금 한 계절의 모습으로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다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단정하고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겨울이 지나면 머지않아 찬란한 꽃이 피는 봄이 올 것이니까. 


힘든 겨울도 언젠가는 내 삶을 선물로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리본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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