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가들이 16세기 초 중남미 식민지배 체제를 구축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중남미에서는 다양한 주체들이 벌리는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스페인 식민시기에는 인디오 원주민들이 스페인 통치에 대해 소규모 군사적 저항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스페인 정부군에 의해 바로 진압되었다. 중남미에서 근대적 의미의 전쟁은 18세기 말 아이티 독립전쟁(1791~1803)과 19세기 초 중남미 독립전쟁이 그 시작이다. 이후에는 신생국가 간 영토전쟁과 역외 국가의 간섭 전쟁 그리고 개별 국가 내전 등이 20세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전쟁의 원인은 인종 충돌, 국가 독립, 국경 분쟁, 원주민 정복, 군벌 경합, 자원 획득, 계층 대립, 역외 간섭, 종교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인종 충돌을 원인으로 발생한 대표적 전쟁은 지배계층인 백인과 피지배계층인 흑인 간에 발생한 아이티 독립전쟁이다.
19세기 초부터 발생한 중남미 독립전쟁은 1824년에야 종료되었다. 10여 년 넘게 계속된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은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 지역에서 동시 다발해 계속되었다.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역내 신생국가들은 곧이어 이웃 국가들과 국경 획정 전쟁에 휘말렸다. 스페인은 식민지를 크게 4개 지역으로 분할하고 지역별로 부왕청을 설치해 통치했다. 독립전쟁 이후 부왕청 관할 지역이 몇 개의 독립국가로 분할되면서 국경 획정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당시 전쟁 분위기에 익숙한 신생국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손쉽게 전쟁 수단을 동원했다.
영토 확장을 목표로 하는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신생국가인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남부 원주민 정복전쟁과 미국이 영토 확보라는 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일으킨 미-멕시코 전쟁(1836~48)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자원 획득을 위한 전쟁도 피할 수가 없었다. ‘질산염 전쟁(Nitrate War)’이라고도 불리고 있는 칠레와 볼리비아 및 페루 연합국가 간의 ‘태평양전쟁(the War of the Pacific, 1879~1883)’이 그 사례이다. 칠레는 태평양전쟁 승리의 대가로 페루 남부와 볼리비아 서부의 광대한 아타카마 지역 획득하였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국가 그리고 미국의 자본주의적 간섭도 중남미 국가들을 불안하게 했다. 역내 신생국가들은 긴 독립전쟁으로 피폐해진 재정확보와 경제개발을 위해 높은 비용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유럽과 미국의 민간차관을 도입하거나 직접투자를 유치하였다. 그러나 역내 국가들은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비효율로 인해 차관 및 투자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종 채무 지불 불능 상황을 맞이했다. 유럽 국가와 미국은 자국의 투자 이익 보호를 위해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간섭을 하였다.
신생국가 주도권 장악을 위한 내부 정치세력 간 갈등으로 야기된 내전도 끊이지 않았다. 연방주의자와 중앙집권주의자, ‘카우디요’로 불리는 군벌들,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원주민, 농민, 도시빈민 중심의 좌파세력과 군벌, 세습 기득권 세력 중심의 우파세력 간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익 독점이 내전의 본질이었다.
종교도 전쟁과 폭력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 미겔 히달고(MIguel Hidalgo)와 호세 모렐로스(José Morelos) 가톨릭 신부는 멕시코 독립전쟁의 시발점이었고 19세기 과테말라 라파엘 카레라(Rafael Carrera) 대통령과 에콰도르 가르시아 모레노(Gabriel García Moreno) 대통령은 가톨릭 교회의 강력한 지지와 지원으로 무력 통치를 하였다.
다양한 배경 속에서 발생한 전쟁은 역내 신생국가들의 국가건설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전쟁으로 발생한 영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사망자와 부상자 수, 인구감소율, 정권의 취득과 상실, 영토의 취득과 상실, 사회적 변혁, 경제적 손익 등이 검토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 수는 종종 그 규모가 부정확하기도 하지만 국가 차원의 희생 규모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19세기 중 중남미에서 발생한 전쟁 희생자 규모는 같은 기간 중 북미의 미국에서 발생한 전쟁 희생자 규모에 비해 매우 크다.
미국 독립전쟁(American Revolutionary War, 1775~1783)의 경우 미국 측 사망자 3만 5천 명, 영국 측 사망자는 3만 명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아이티 독립전쟁의 사망자 수는 35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20만 명은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종이고 나머지는 프랑스군 7만 5천 명, 영국군 4만 5천 명, 기타 백인 농장 경영자 2만 5천 명 등이었다.
19세기 후반기 중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3국 동맹 간에 벌어진 ‘삼국동맹전쟁(the War of Triple Alliance, 1864~1870)’전쟁에서 패전한 파라과이는 전체 인구 52만 5천 명 중 30만 명을 잃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 삼국동맹은 전체 인구 1,085만 명 중 18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독립전쟁 시기 중 멕시코, 에콰도르, 베네수엘라는 전체 인구의 25%를 잃었고 삼국동맹전쟁에서 파라과이는 전체 인구의 60%를 잃었는데 특히 15~50세 남자들은 80%가 사망했다. 이와 비교해 미국 남북전쟁(U.S. Civil War)에서 가장 많은 인적손실을 입은 북군의 사망률은 13%이었다.
전쟁 영향을 측정하는 다른 지표는 전쟁이 끝난 뒤 국가원수 교체 상황이다. 독립전쟁 이후 신생국가들의 대통령은 대체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들의 차지가 되었다. 곧 이어진 국가건설 시기에 발생한 내전에서는 무력을 보유한 지방 군벌인 일명 카우디요(Caudillos) 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중남미에서 다발한 군부 쿠데타로 이어졌다.
영토 확장은 특히 가시적 전쟁 성과이다. 미국은 미-멕시코 전쟁에서 승리한 뒤 당시 멕시코 전체 국토의 50%를 병합해 역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칠레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여 광대한 아타카마 사막지역을 확보했다. 아타카마는 현재 칠레 주력 수출상품인 구리와 미래의 에너지 자원인 리튬이 대량 매장되어 있는 지역으로 칠레의 역내 정치경제적 위상이 강화되는 배경이 되었다.
전쟁은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삼국동맹전쟁’의 승리 이후 브라질에서는 전쟁에서 성과를 보여준 군부의 역할과 입김이 커졌다. 이 결과 군부는 1889년 브라질 군주제가 붕괴하고 공화국으로 탈바꿈하는데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편 직업 군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흑인 출신 등 유색인 출신 군인들의 사회적 활동영역도 넓어졌다.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중남미 주요 전쟁은 몇 가지로 분류해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독립전쟁으로 아이티 독립전쟁(1791~1803)과 이후 이어진 중남미 독립전쟁이다. 중남미 독립전쟁도 다시 뉴 그라나다 부왕령과 베네수엘라 총독령 독립전쟁, 리오 대 플라타 부왕령 독립전쟁, 페루 부왕령 독립전쟁, 뉴 스페인 부왕령 독립전쟁, 브라질 부왕령 독립전쟁 등이 있다.
둘째 국가건설 초기 국경전쟁인데 리오 데 라플라타 연방과 브라질 간 전쟁 그리고 우루과이 독립, 페루-그란 콜롬비아 전쟁이 있다.
셋째 국가 분리 전쟁인데 여기에는 아르헨티나 내전, 중미 연방 전쟁, 페루-볼리비아 연방과 칠레 간 연방전쟁, 에콰도르 과야킬-키노 간 내전, 미국-멕시코 전쟁, 멕시코 혁명, 삼국동맹 전쟁, 쿠바독립 전쟁, 태평양 전쟁, 미서 전쟁 등이 있다.